18.10.13 17:56최종 업데이트 18.10.13 17:56
 

항일 군사조직인 조선의용대를 조직한 약산 김원봉(1898~1958). 그는 일찍이 의열단을 조직하여 기관 파괴와 요인 암살 등 여러 차례 무정부주의적 항일투쟁을 전개해 왔다. ⓒ 위키백과

 
김원봉 소년은 전국 무전여행의 길을 떠났다. 

그가 다닌 곳은 지리산ㆍ계룡산ㆍ경주ㆍ부여 등지였다. 여행 일정에 경주와 부여가 포함된 것을 보면 나라 잃은 소년으로서 옛 왕조의 도읍지를 찾아 역사의식을 고취하고자 하는 속내가 배었을지 모른다. 


소년 방락객에게 논산을 제외하고는 가는 곳마다 친절과 환대가 있었다. 지방에서는 아직까지 한국 고유한 인정이 남아있었던 것이다. 소년은 사람들을 만나면 나라 망한 사정을 밝히고, 자기의 포부를 토로하자 더러는 감동하기도 하고 격려도 하면서 씨암탉을 잡아 대접하는 늙은 부인도 있었다.

여행 중에 가장 값진 성과는 부산서 만난 김철성(金鐵城)과 영주의 강택진(姜宅鎭)이었다.

"강씨는 사회주의자로써 운동을 위하여 사재를 내어놓은 사람이다. 일야담소(一夜談笑)로 주객이 지기상합(志氣相合) 하였고, 김철성과는 장래 국사를 위하여 서로 목숨을 아끼지 않을 것을 굳이 맹세하였던 것이다."  (주석 1) 라고 술회할 만큼 여행길에서 좋은 동지들을 만났다. 부산에서는 박재혁과 최천택 등 구세단 팀과도 만났을 것이다. 

김원봉은 전국을 유람하면서 대한광복회와 여타 여러 항일단체 회원들이 운동자금을 모집하면서 친일배와 탐관오리들을 척결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대한광복회 총사령 박상진이 독립운동 자금 요청을 거절한 경상도 제1의 부호 장승원을 처단한 사실도 알았다. 김원봉은 이를 적극 지지하면서도 적지 않는 회의감도 품게 되었다.

강력한 무력으로서만, 비로소 조선은 강도일본의 기반(羈絆)을 벗어나서, 자주독립국가가 될 수 있다. - 하는 것은, 그의 굳은 신념이다. 그는 하루바삐 군대를 조직하여 훈련하고 싶었다.

그러나 군대를 양성하기 위해서는, 우선 자기 자신이 군사학을 알아야 한다. 그는 당시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군대를 가지고 있는 독일로 가서 공부하고 싶었다. 그러나 일에는 순서가 있다. 그러하기에는, 또 먼저 독일어를 배워야 한다…….
(주석 2)
 

조선의용대 대장 시절의 약산 김원봉. 1940년대 대원들 앞에서 연설하던 장면을 선무공작 영상으로 촬영했다. ⓒ 위키피디아



김원봉의 무장투쟁론의 씨앗은 이렇게 하여 싹트게 되었다. 

'씨앗'은 무럭무럭 자라났다. 김원봉은 전국을 다니면서 배운 결론으로 군대를 양성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군사학을 배워야 하겠다는 결심을 하기에 이르렀다. 군사학 공부는 당시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군대를 가지고 있다는 독일로 가서 공부하고 싶었다. 먼저 독일어를 배우기 위해 중국 텐진(天津)에 독일인이 경영하는 덕화학당이라는 중학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목표가 설정되면 분연히 실천하는 것이 김원봉의 특장이었다. 

톈진으로 가기로 했다. 일이 잘 풀리느라고 그를 항상 격려해 온 한봉인(韓鳳仁)이란 친구와 최천택이 여비를 마련해 주었다. 

1916년 10월, 김원봉은 고국을 떠나 텐진으로 가서 덕화학당에 입학하였다. 어느새 피끓는 19세 청년이 되었다. 덕화학당에서는 독일어보다 중국어를 배우는 데 열중하였다. 산설고 물설은 이국 땅에서 살기 위해서는 우선 그 나라 언어를 배우는 일이 시급했다. 

이듬해 여름 휴가를 이용하여 잠시 귀국하는 길에 안동현 (현 단동)에서 손일민·김좌진 등 독립운동가들을 만났다. 이들은 광복회 회원으로서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이들로부터 적지 않은 영향을 받게 되었다.    
김원봉이 고국에 돌아와 있는 동안에 국제정세가 변하여, 중국이 독일에 선전포고 하면서, 중국에 있는 독일인들은 모두 국외로 추방당하고, 덕화학당도 폐쇄되었다. 1914년 7월에 일어난 제1차 세계대전의 여파로 중국과 독일 사이에 적대관계가 형성되고, 김원봉의 신상에까지 중대한 변화를 일으켰다. 그가 독일로 가서 본격적인 군사학을 공부하겠다던 꿈은 이로써 사라지게 되었다.

김원봉은 새로운 계획을 설계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새로운 국제질서가 형성되어 가고 있었으며, 러시아에서는 1917년 10월 혁명이 일어나고, 프롤레타리아 해방론이 거세게 전파되고 있었다. 김원봉의 꿈은 중국대륙으로 건너가서 실력을 갖추고 무장세력을 형성하여 일제와 싸우겠다는 데로 모아졌다. 이런 시절에 박재혁은 김원봉을 만나 동지의식을 갖게되고 독립운동에 함께 나서기로 약조하였다. 

주석
1>앞의 책, 18쪽.
2> 앞의 책, 19쪽.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인물열전] 의열지사 박재혁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취재후원

독자의견


다시 보지 않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