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0.04 09:06최종 업데이트 18.10.04 09:06
일제강점기의 학교 미술교육

일제강점이 이루어지자 일본은 먼저 학교 교육을 장악하여 어린 학생들부터 황국 식민화하기 시작한다. 많은 관립학교가 세워졌으며, 일본에서 능력 있는 교사들을 불러들여 식민지 교육을 강화하였다. 중등학교의 미술교육도 이에 따라 철저하게 일본식으로 재편되었다. 일본 제국주의는 일본 최고의 미술학교인 도쿄미술학교 출신의 미술 전공자를 불러들여 학교 미술교육을 담당하게 하였다.

일본인 미술 교사들은 비록 식민지 정책을 수행하기 위하여 한국에 들어왔지만, 근대식 미술 교육을 전혀 받지 못했던 한국의 입장에서는 서구적인 미술 교육의 장을 여는 첫 걸음이라 할 만한 중요한 순간이었다. 이들 미술 교사들은 대부분 제도적인 학교 교육을 수행하느라 화가로서 활동할 만한 여유를 갖지 못하였다. 그 중에 일부 뛰어난 미술 교사들은 학생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어, 훗날 그들이 뛰어난 화가로 성장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1950년대 후반 경복고등학교의 모습(왼쪽 끝 가운데 큰 건물) ⓒ 이건중

 
관립 중등학교로 제일 앞서 세워진 곳은 경성제1고등보통학교(아래 경성제1고보), 평양고등보통학교, 대구고등보통학교 등이 있었으나, 미술로서 가장 주목 받은 학교는 경성제2고등보통학교(아래 경성제2고보, 현 경복고등학교)였다.

1921년에 개교한 경성제2고보는 경성제1고보(현 경기고등학교)에 이어 한국인이 다니던 명문학교이다. 이 학교는 훗날 한국 근대 미술계를 대표하는 화가를 여럿 배출하는데, 이렇게 된 배경에는 당시 미술 교사로 있었던 야마다 신이치(山田新一, 1899-1991)와 사토 구니오(佐藤九二男, 1897-1945)라는 뛰어난 두 명의 일본인 선생의 영향이 컸다.

경성제2고보 미술교육의 틀을 잡은 야마다 신이치
 

1929년 파리에서의 야마다 신이치와 야마다 신이치 ‘주을온천’ 1931년 ⓒ 황정수

 
제2고보가 세워지고 처음으로 미술 교사로 부임했던 이는 야마다 신이치이다. 그는 도쿄미술대학에서 후지시마 다케지(藤島武二, 1867-1943)에게서 배운 촉망 받는 화가였는데, 1923년 제2고보에 부임하여 1927년까지 근무한다. 미술학교 동기로는 사에키 유조(佐伯祐三), 사토 구니오가 있으며, 한국인 동기로는 설초(雪樵) 이종우(李鍾禹, 1899-1981)가 있었다.

야마다 신이치는 경성중학교의 히요시 마모루(日吉守), 용산중학교의 토다 가즈오(遠田運雄) 등과 함께 '조선미술협회'를 설립한다. 또한 1924년부터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하여 제3회, 제4회 전람회에서 연거푸 3등상을 받는 등 뛰어난 성과를 보인다. 


그는 1928, 1929년 2년간의 유럽 체재기간 등을 제외하고는 줄곧 경성에서 활동한 경성 화단의 중심인물이었다. 조선미술전람회 심사에도 참여하였으며, 고희동(高羲東, 1886-1965)이나 이한복(李漢福, 1897-1944)과 같이 도쿄에 유학한 한국 화가들과 가까이 지냈다.

야마다 신이치는 화가로서 한국에서 많은 활동을 하였지만 그동안 현전하는 실물 작품이 없어 그의 솜씨를 가늠하기 어려웠다. 다행히 얼마 전 소품 한 점이 발굴되어 그의 필치를 가늠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작품은 1931년에 제작된 작품으로 함경도로 사생여행을 떠나 '주을온천' 지역을 그린 것이다. 송판에 가는 붓으로 송판 바닥이 보일 정도로 얇게 그린 필치가 매우 세련되고 감각적이다. 이 작품은 경성에 돌아와 당시 조선저축은행 은행장으로 한국미술품을 많이 소장하였던 미술애호가 모리 고이치(森悟一)에게 선물로 준다.

제2고보 출신 한국인 화가 정현웅과 심형구
        

정현웅 ‘금강산’ 1940년 경 ⓒ 황정수

 
야마다 신이치가 미술교사로 있을 때 배운 한국인 학생으로 후에 화가가 된 인물로 정현웅(鄭玄雄, 1911-1976)과 심형구(沈亨求, 1908-1962)가 있다. 두 사람은 동기생이었다.

정현웅은 제2고보 재학 중이던 1927년 제6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고성(古城)'이 입선하고, 1927년 제7회 미전에서는 '역전의 큰길'이 잇달아 입선하여 그림 재주를 보인다. 고보를 졸업하고 도쿄에 있는 가와바타미술학교(川端畵學校)에 다니나 경제 사정과 건강 문제로 6개월 만에 귀국하고 만다.

정현웅은 돌아와 그림에 전념하면서 잡지 등에 표지, 삽화, 만화를 그리는 등 정력적인 활동을 한다. 1950년 전쟁 시기에 남조선미술동맹 서기장이 되었고, 9월 후퇴하는 인민군과 함께 월북하였다.

정현웅의 많은 미술 활동에 비해 현전하는 작품은 극히 드물다. 여성의 초상을 그린 유화 한 점과 수묵화 한 점이 그동안 전해진 전부였다. 그러나 이 두 작품 외에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은 또 한 점이 전한다. 이 작품은 1940년 전후에 그린 것으로 당시 조선일보 기자에게 그려준 것이다. 당시 많은 이들이 소재로 다루었던 금강산을 그렸는데, 감각적인 필치와 산뜻한 색감이 조화를 이룬다.
 

심형구 ‘성공회당’ 1961년 ⓒ 황정수

 
심형구는 고보를 졸업하고 도쿄미술학교 서양화과로 유학을 떠난다. 그는 미술학교 재학 중인 1935년 제15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하여 특선을 하고, 이듬해 졸업한다. 이어 제16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특별상인 총독상을 받은 이래, 여러 번 특선을 하여 주목을 받는다. 이인성(李仁星, 1912-1950), 김인승(金仁承, 1910-2001)과 함께 추천작가가 되어 일제강점기 한국을 대표하는 상징적인 화가가 된다.

심형구의 작품 또한 전하는 것이 많지 않다. 평생 작품을 많이 그리지 않은데다, 교육 활동에 힘을 기울이다 보니 많이 그리지 못한 영향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얼마 전 덕수궁에서 성공회 성당을 바라보며 그린 참한 그림 한 점을 보게 되었다. 궁궐의 문을 테두리 삼아 성당을 그린 구도가 일본 전통 미술의 구도를 차용한 듯한 모습이다. 일본 미술학교에서 공부했으니 이런 구도가 자연스럽게 나올 수 있었을 것이다.

경성제2고보 미술을 꽃피운 사토 구니오
 

사토 구니오와 미전을 준비하는 사토 구니오와 학생들 ⓒ 황정수

 
야마다 신이치의 뒤를 이어 미술 교사로 온 이는 도쿄미술학교 동기 동창생 친구인 사토 구니오이다. 그는 1927년 한국에 건너와 제2고보의 미술교사를 맡는다. 그가 제2고보에 근무하는 동안 많은 학생들이 그의 지도를 받아 화가로서 입지할 꿈을 갖는다. 유영국(劉永國, 1916-2002), 장욱진(張旭鎭, 1917-1990), 임완규(林完圭, 1918-2003), 김창억(金昌億, 1920-1997), 이대원(李大源, 1921-2005), 권옥연(權玉淵, 1923-2011) 등 뛰어난 화가들이 모두 그의 제자들이다.

그는 학교에서 단순히 미술 교사의 역할만을 한 것이 아니라, 제자들에게 인격적으로 영향을 끼쳐 삶을 변화시킨 특별한 존재였다. 제2고보가 미술로 유명세를 얻게 된 것은 모두 사토 구니오의 힘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1928년, 1929년 조선미술전람회에 연속 출품하여 특선을 하나, 이후에는 출품하지 않고 조선예술사, 조선창작판화협회, 조선앙데팡당전 등 재야활동에 정력적으로 참가한다.

사토 구니오는 교육활동 외에도 화가로서 적지 않은 활동을 하였다. 그럼에도 오랫동안 그의 행적이 전해지지 않고 작품도 한 점 남아 있지 않았다. 다행히 몇 년 전 일본에서 유족이 나타나 그의 행적과 작품에 대해 대략이나마 알 수 있게 된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여전히 한국에는 그의 작품이 한 점도 전하지 않는다. 그나마 그가 재직한 고보 졸업 앨범에서 그의 사진과 미술반 활동을 하는 장면을 찾을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었다.

한국 근대미술사를 장식한 유영국과 장욱진
    

유영국 ‘사람’ 1958년, 좌 / 장욱진 ‘자화상’ 1951년, 우 ⓒ 장욱진미술문화재단

 
사토 구니오의 영향을 받은 대표적인 화가로 먼저 유영국과 장욱진을 꼽을 수 있다. 유영국은 제2고보에 진학하나 2학년 때 사정상 학교를 그만두고, 도쿄 문화학원으로 유학을 떠난다. 그는 한국 모더니즘과 추상화의 선구자라 할 만하다.

그의 작품에 보이는 강렬한 색과 기하학적 구성은 서사적 장대함과 서정적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있다. 그가 활동한 '신사실파'와 '모던아트협회'는 한국 근현대 미술의 상징적인 모임이었다. '사람'이란 제목의 작품은 인체를 소재로 한 유일한 작품으로 '모던아트협회' 전시회에 출품된 그의 50년대 대표작이다.

장욱진 또한 사토 구니오의 영향을 받은 대표적인 화가이다. 그는 이미 보통학교 시절부터 출중한 미술 실력을 보였는데, 제2고보에 진학하여 미술반에서 사토 구니오를 만나 미술에 눈이 트인다. 그때 수업을 통해 입체파와 피카소의 미술세계를 처음으로 접할 수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장욱진은 개인 사유로 3학년에 중퇴하고 양정고보에 편입학을 하여 졸업한다. 1939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제국미술학교 서양화과에 입학하여 훗날 한국의 대표적인 화가가 된다. 두 사람 외에 임완규와 김창억 또한 제2고보를 졸업하고 도쿄제국미술학교로 유학한 재원들이었다.

한국 장식미술의 수준을 높인 이대원과 권옥연
       

이대원 ‘온정리 풍경’ 1941년 ⓒ 삼성미술관

 
이대원은 미술을 좋아하였으나 집안의 반대로 미술학교로 진학하지 않고, 경성제국대학교 법문학부를 졸업한다. 그러나 평생 화가로 활동한다. 그를 화가로 살도록 영향을 준 이가 바로 사토 구니오이다.

그는 보통학교부터 중등학교시절까지 여러 차례 학생미전에서 수상하였고, 1938년부터 40년까지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연속 입선하였으니 화가로서 자격이 충분한 인물이었다. 그의 그림은 초기에는 한국의 풍경을 단순한 필법과 구성으로 소박하게 재구성하였고, 1980년대 이후에는 자연과 생명에 대한 찬미를 찬란하게 빛나는 색채로 표현하였다.

권옥연은 함경남도 함흥의 부자 집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좋은 미술품은 볼 기회가 많았다. 이러한 그의 품성은 경복고등학교에서 사토 구니오를 만나 미술에 전념하도록 만든다. 고보 졸업 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1944년 일본 도쿄제국미술학교를 졸업한다. 1950년대 당시로서는 드물게 파리 유학을 통해 앵포르멜 등 유럽 미술의 최신 경향을 직접 체험하고 개성적인 추상양식을 구축하였다.

필자와 권옥연 선생과의 인연

권옥연 선생은 필자와 생전에 잊지 못할 작은 인연들이 있다. 선생이 세상을 떠나기 전 몇 년 동안 가끔 만나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주로 일제강점기 도쿄제국미술학교 시절과 파리 시절 경험을 많이 말씀하였다.

일본인 스승인 긴바라 세이코((金原省吾, 1888-1958)와 당대 최고의 스타였던 레오나르도 후지타(藤田嗣治, 1886-1968) 등 일본 화가에 대한 이야기를 특히 많이 하였다. 귀찮은 질문에도 싫은 내색 없이 재미있는 일화를 많이 들려주었다.
       

권옥연 ‘부운(浮雲)’ ⓒ 황정수

 
한 번은 당신의 젊은 시절 이야기를 많이 알고 있는 후배와의 대화가 즐거우셨는지 술 한 잔 하자고 하셨다. 그러시면서 "내가 요즘 술을 한 잔도 안 하는데, 자네를 만나니 한 잔만이라도 하고 싶네"라고 말씀 하실 때에는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그날 선생은 결국 소주 두 잔을 드셨다. 추사 김정희의 글씨 이야기 끝에 A4용지에 몽땅 붓으로 '부운(浮雲)'이라 쓰고, 그 옆에 잔글씨로 '인생은 한 조각 뜬 구름 같구나!(人生如一片浮雲)'라 몇 자 적어 주었다. 그런 얼마 후 홀연히 세상을 떠나고야 말았다. 마음 한 구석에 휑하니 쓸쓸한 바람이 불어왔다.
              

권옥연 ‘법정 스님에게’ 2001년 ⓒ 황정수

 
선생이 가신 후 바로 얼마 후 또 하나의 인연이 생겼다. 선생의 특별한 그림 한 점이 내 집에 걸리게 된 것이다. 선생이 법정(法頂, 1932-2010) 스님을 위해 도록 안쪽 종이에 그림을 그리고 서명을 한 것이다. 법정 스님도 떠나고 선생도 떠나니, 인연처럼 이 작품이 내 손에 들어왔다.

법정 스님은 권 선생뿐만 아니라 필자가 존경하여 가까이 모셨던 화가 백영수 선생과도 깊은 친분이 있었다. 또한 백영수(白榮洙, 1922-2018), 권옥연 두 분은 동년배에 파리에서도 오랜 친분을 쌓은 친구 사이였다. 세 분은 그렇게 가까운 사이였다.

이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권옥연, 백영수, 법정 세 분의 우정이 떠올라 마음이 흐뭇해진다. 본격적인 작품이 아닌 소략한 소묘지만 정겨운 그림이다. 글씨가 그림에 비해 지나치게 커 아쉽긴 하나 김정희의 영향을 받은 듯한 특유의 글씨로 거침없이 쓴 글씨에서 선생의 성격과 예술적 향취가 난다.

역시 예술은 세련된 기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삶의 향기가 묻어나는 '격조'가 가장 중요한 덕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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