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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2018.09.20 08:51 수정 2018.09.20 08:51
30여 년 전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회사의 입사 시험에 "한국미술사에서 유명한 '남농(南農)'에 대해서 아는 대로 답하라"라는 문제가 출제되었다. 그 중에 가장 많은 답이 "남쪽 지역이 농사가 잘 된다"였다고 한다.

'남농'은 호남 남종화의 상징적인 인물인 허건(許健)의 호인 '남농(南農)'이었는데, 엉뚱한 답이 쏟아져 나온 것이다. 이밖에도 상상하기 어려운 여러 가지 의외의 답이 나와 많은 화제가 되었다. 그만큼 한국 지식인들의 미술 교양이 부족하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내용이었다.
 

청전 이상범 ⓒ 임응식

 
그런 우리나라에서 비교적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유명한 화가가 바로 '청전(靑田) 이상범(李相範, 1897-1972)'이다. 한국 전통미술에 관심이 적어도 한국의 산수화 하면 떠올리는 인물이 이상범이다. 그만치 이상범이란 이름은 한국 미술을 대표하는 고유명사이다.

여전히 미술품 경매회사의 경매에서도 그의 작품이 끊이지 않는 것은 애호가들 사이에 평가가 시들지 않고 있음을 보여준다. 특히 한국의 시골 마을을 서정적 정취로 그린 산수화는 한국 미술을 지탱하는 상징적 화면으로 자리 잡고 있다.

미술품 수집가들의 신적 존재

한국 동양화의 전성기는 1980, 1990년대였다. 집이 있는 사람들은 누구나 동양화 한 점씩은 걸만큼 집안 장식의 큰 부분을 차지하였다. 각 동네에는 화랑을 겸한 표구사 몇 개쯤은 성업 중이었다. 표구사는 국전을 준비하는 화가들로 늘 바빴고, 그 결과에 따라 입선한 작가는 얼마, 특선한 사람은 또 얼마, 심사위원은 또 얼마, 이런 식으로 가격이 형성되었다.

구매자들은 취향과 경제 사정에 따라 수집하거나 집안을 장식했다. 이때 애호가들 사이에 가장 인기가 있었던 이가 이상범과 소정(小亭) 변관식(卞寬植, 1899-1976)이었다. 특히 이상범의 작품은 화단에서 가격이 제일 높았을 뿐 아니라 그림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꿈꾸는 마지막 대상이었다.
 

이상범 <하경산수>·<추경산수> 1959 ⓒ 연세대학교

 
학창시절부터 미술을 좋아했던 필자는 우연한 기회에 이상범의 작품을 마음 속 깊이 새기게 된다. 학생시절 공부가 지독히도 싫었지만, 어쩔 수 없이 도서관에 자주 다녀야만 했다. 이때 다니던 학교의 도서관 1층에는 엄청나게 큰 산수화 두 점이 걸려 있었다.

오가며 슬쩍 슬쩍 보다 보니 은근히 정이 들었다. 관심을 가지고 자세히 낙관을 살펴보니 이상범의 초대형 그림 두 점이었다. 한 점은 하경산수이고, 또 한 점은 추경산수였다. 세로는 3m가 훨씬 넘고, 가로는 2m가 넘는 이상범이 평생 그린 그림 중에 가장 규모가 큰 것이었다.

1959년에 제작된 것인데 당시 총장이었던 백낙준이 특별히 주문하여 그린 것이라고 한다. 이 두 점은 이상범의 전작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구성과 필치를 보여주는 작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명품 중의 명품이었다. 늘 이 그림을 보다보니 자연스럽게 1950년대 이상범의 농촌 풍경이 눈에 익숙해졌다.

그런 이유에서인지 나는 이상범의 그림은 50년대에 그린 서정성이 강한 부드러운 가을 풍경이 가장 좋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이 그림을 오가며 자주 보다보니 때가 되면 한 점 갖고 싶다는 욕구가 생겼다. 그렇게 이상범의 그림은 내 마음 속에 깊이 자리 잡았다.

청전 이상범의 집을 찾아가다
 

이상범의 집과 화실 ⓒ 황정수

 
청전 이상범은 그림만 유명한 것이 아니라 그의 집도 유명하였다. 그의 집은 종로구 누하동에 있었는데, 그의 집에서 화숙을 운영하고 있어서 많은 화가 지망생들이 모여 들었다. 화숙 이름은 '청전화숙(靑田畵塾)'이라 하였다.

집은 인왕산 필운대 아래 자리 잡고 있는데 골목 깊숙한 곳에 있었다. 서촌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한 번은 들러야 하는 유명한 곳이지만 찾기는 그리 쉽지 않다. 작은 골목 속에 숨어 있는데도 안내판이라곤 길 건너 편 가로수에 붙어 잘 보이지도 않는 작은 것 하나 뿐이다. 처음 가는 사람은 안내를 받지 않고서는 찾을 수가 없을 정도이다.

누하동 178, 181번지. 바로 한국미술의 상징과도 같은 화가인 이상범이 살던 집과 화숙이 있던 곳이다. 한국 동양화 정신을 현대에 이어준 산실이기도 하다. 집은 아담한 한옥이다. 조선시대에 지은 전통적인 한옥은 아니고, 1930년대에 새로운 형식으로 지은 개량 한옥이다.

이상범은 1930년대부터 이 집에 살기 시작하여 생을 마칠 때까지 지낸다. 집이 크지 않은데, 아들들과 함께 살아 화실을 두기 어려웠다. 그래서 옆집을 사서 화실을 꾸몄는데, 그것이 바로 유명한 '청전화숙'이다. 그는 이곳에서 그림을 그리기도 하고 제자들을 가르쳤다. 수십 명의 화가가 이곳에서 그의 지도를 받으며 한국을 대표하는 화가로 성장했다.
     

이구영 '누하동천'(좌), 유소영 '청전화숙'(우) ⓒ 황정수

  

청전화숙 풍경 ⓒ 황정수

 
이상범 가옥은 말 그대로 그가 생활하던 집이고, 그의 화실 청전화숙은 옆집을 사서 안쪽에서 터서 서로 오갈 수 있게 한 곳이다. 집의 정면에 걸려 있는 당호 '누하동천(樓下洞川)'이란 글씨는 이상범의 글씨로 아는 이들이 많지만, 사실은 한학자로 유명한 노촌(老村) 이구영(李九榮, 1920-2006)의 글씨이다. 담벼락의 꽃문양 벽돌이 참으로 아름답다. 화실은 아직 그의 손때가 묻은 물건을 그대로 둔 상태였다.

생생한 느낌의 초상화가 주인처럼 방을 지키고 있고, 민형식(閔亨植, 1859-?)과 손재형(孫在馨, 1903-1981)에게서 받은 글씨가 걸려 있는 것으로 그의 교류 관계를 알 수 있다. '청전화숙'이라 현판을 쓴 이가 궁금하여 보니, 의외로 유명한 작가가 아닌 운방(芸邦) 유소영(柳小英)이란 이다. 생각해 보니 유명한 서예가 검여(劍如) 유희강(柳熙綱, 1911-1976)의 딸로 홍대 미대를 다닌 이다. 사제 간의 인연으로 쓴 것으로 보인다.

한국 패거리 미술의 원조 청전화숙

한국미술사에서 화가 이상범이 이룬 중요한 사실 중 하나는 개인적으로 청전화숙을 운영했다는 것이다. 화숙은 일본식 미술교육 형태로 개인적으로 도제교육을 하는 곳이다. 그는 누하동 자신의 작업실에 청전화숙이란 이름을 걸고 제자들을 모아 그림을 가르친다.

화가가 화숙을 운영하는 것이 문제될 것은 없으나, 그가 조선미전의 심사에 관여하고 있는 권력자였기 때문에 제자들이 몰려 세력을 만들 수 있었다는 면에서 훗날 한국미술계를 패거리화 하는 원조가 되었다는 비난의 빌미가 될 수도 있다.

실제 당시 한국을 대표하는 미술 세력은 조선미술전람회의 심사참여로 활동한 김은호와 이상범 두 사람이었다. 먼저 화숙을 만든 이는 김은호(金殷鎬, 1892-1979)였다. 김은호는 1929년 자신의 집에 '낙청헌(絡靑軒)'이란 화숙을 설치하여 제자들을 받아들여 조선미전에서 괄목할 만한 활동을 보인다.

이어 1933년에 이상범이 '청전화숙'을 설립한다. 다분히 김은호의 낙청헌을 의식한 행동이었다. 낙청헌은 주로 채색화를 중심으로 하는 북종화 계열로 활동하였고, 청전화숙은 산수화를 중심으로 한 남종화 계열로 활동하며 한국미술계를 양분하였다.

이때부터 한국미술계의 계보 미술이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 두 조직이 훗날 서울대와 홍익대가 한국미술계를 양분하는 상황의 시원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김은호의 후예들이 주로 서울대에 자리 잡았고, 이상범의 후예들이 주로 홍익대에 자리를 잡았다. 그래서 초기에는 서울대가 북종화 계열의 감각적인 회화가 강하고, 홍대는 산수화 등 남종화 계열이 강했다. 점차 이런 분위가 퇴색해 갔지만 교풍의 원류가 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청전화숙전 제2회 팸플릿의 부분(1942년) ⓒ 황정수

 
청전화숙의 동문전은 1941년에 처음 전시회를 하여 1943년까지 3회가 열렸다. 주요 제자로는 수제자로 불리는 배렴(裵濂)이 있고, 후에 월북한 정종녀(鄭鍾汝)와 이상범의 아들 이건영(李建英)이 있다. 여성으로는 정용희(鄭用姬)와 이현옥(李賢玉)이 있었으며, 일제말기에는 박노수(朴魯壽)도 이곳에서 배웠다. 청전화숙 출신 화가들은 조선미전을 통해 수묵산수화의 큰 맥을 형성하였다. 향토적인 소박한 자연을 소재로 한 그들의 산수화는 '청전풍(靑田風)'이라 불리며 큰 인기를 누렸다.

이상범에 대한 두 가지 상반된 평가

이상범은 화가로서 당대 최고의 지위를 누렸지만, 역사적 인물로서는 그리 행복한 편은 아니다. 1936년 <동아일보> 조사부에 근무할 때 베를린 올림픽에서 손기정이 금메달을 따자 일장기를 말소한 신문을 내보낸 것에 연루된다. 이때 강제 해직되어 마치 민족정신을 고취한 민족 지사처럼 평가 받았다.

반면에 일제강점기 일본 문화정치의 첨병인 조선미술전람회에 깊이 관여하여 앞장 선 것과 친일 작품을 신문에 게재한 것 등으로 친일미술인으로 낙인찍히게 되기도 한다. 이런 상반된 평가는 화려했던 한 화가의 면모를 우울하게 만드는 아킬레스건이 되고 말았다.
       

손기정 일장기 말소, '님의 부르심을 받들고서' 기사 ⓒ 황정수

 
이상범이 <동아일보> 근무할 때 같이 근무했던 이 중에 역시 그림을 그리던 청정(靑汀) 이여성(李如星, 1901-?)이 있었다. 두 사람은 모두 <동아일보> 조사부 소속으로서 이여성은 부장이었고, 이상범은 주로 삽화를 그리던 주목받는 화가였다.

이런 인연으로 두 사람은 손기정 선수의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제패 때 일장기 말소 사건에 함께 연루돼 강제해직된다. 당시 이여성은 이미 서화협회전에서 동양화로 입선한 적이 있고, 1935년는 이상범과 함께 2인전을 열기도 한 전문 화가였다.
                             

이여성 '격구' ⓒ 마사회박물관

 
이여성은 해직 후 동아일보사 근처 중학동에 살다, 1938년 옥인동으로 이사 온다. 이상범의 집 바로 근처인데, 이때 자주 청전화숙에 들려 그림을 그리곤 한다. 경북 칠곡의 부잣집 아들이었던 이여성은 집안의 도움으로 새로 지은 2층 양옥을 마련한다.

이상범과 이여성이 같은 직장에 있었고, 함께 2인전을 열었고, 호에서도 '푸를 청(靑)'자를 공유한 것을 보면 두 사람은 사제였을 가능성이 많다. 그동안 이여성의 미술 학습에 대한 연원이 전해지지 않았는데, 이런 상황을 보면 이상범과 이여성은 사제 관계였음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한편 이상의 일장기 말소 사건과 상반되게 이상범에게는 늘 '친일 미술인'이라는 굴레가 씌워져 있다. 이상범은 조선미전이 창설되자 적극 참여하여 수상을 거듭하고 1938년에는 한국인 심사위원 자격으로 심사참여에 임한다. 한 해 먼저 참여한 김은호에 이어 두 번째이다.

두 사람은 1944년 해방 전 마지막 전람회까지 심사로 적극 참여한다. 또한 일제 강점기 말기에 조선미술가협회 일본화부에 가담하고, 반도총후 미술전람회 심사위원을 지내는 등 국방헌금을 모금하기 위한 국책 기획전에 참가한다. 이런 행위는 적극적인 친일 행위라는 비난을 면하기 어려운 행동이다.

이상범이 <매일신보>에 징병제 실시를 축하하며 기고한 삽화 '님의 부르심을 받들고서' 등은 대표적인 친일 작품으로 남아 있다. 이런 이유로 이상범은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미술부문에도 친일미술인으로 올라 있다.

그의 아들인 이건영(李健榮, 1922-?)도 1942년 반도총후미술전에 '개발지(開發地)의 추(秋)'를 출품하고, 또 1944년 결전미술전람회 일본화부에 '도전하다'를 출품하여 역시 친일미술인에 올라 있는 것을 보면 역사의 준엄함을 느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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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 국문학과 석사 과정을 마치고, 고교 국어 교사를 11년간 하였다. 2001년 교사 퇴직 후 줄곧 미술사 연구에 몰두하였다. 저서에 《경매된 서화》 (김상엽 공저, 시공사, 2005)가 있고, 논문에 <소치 허련의 완당 초상에 관한 소견>(《소치연구》 창간호, 2003) 외 다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