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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2018.07.09 07:56 수정 2019.06.25 15:32

난징 리지샹 위안소 유적 진열관 벽면 난징 리지샹 위안소 유적 진열관 마당엔 위안부 피해 할머니 70명의 얼굴 사진을 모아 벽면을 꾸며놨다. 가만히 보고 있으면 형언할 수 없는 아픔이 밀려온다. ⓒ 김종훈


다들 감정이 비슷했나 봅니다. 난징 리쟈싱 위안소를 나온 < How are you 임정 > 취재팀 4인의 눈시울이 하나같이 붉어졌습니다. 생각해 보면 분노 때문이기도 했고 미안함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나라를 잃었다는 이유로, 소녀들은 이곳 난징까지 끌려와 능욕을 당했습니다. 이 사실을 마주하자 80년이라는 세월을 뛰어넘어 자책과 회한이 밀려왔습니다. 

왜 우리는 온전히 기록하고 기억하지 못한 것일까? 그때처럼 우리가 나라가 없는 것도 아닌데, 그때처럼 우리가 힘이 없는 것도 아닌데, 무엇이 부끄러워 당당한 사실을 자꾸만 왜곡하고 축소하고 감추려 한 것일까?

그래서 다들 그렇게 눈물이 났나봅니다. 살아남은 세대의 미안함과 분노 때문에 말입니다.

지키려한 중국

난징 리지샹 위안소 유적진열관(利濟巷 慰安所 舊址陳列館)은 2015년 12월 1일 정식 개관했습니다. 아시아 최대 규모고 무엇보다 평안도 출신 박영심 할머니가 이곳 두 번째 건물 19번방에서 3년 동안 위안부 생활을 했습니다. 

박 할머니가 2003년 11월 21일 현장을 찾아 "내가 있던 곳이 여기"라고 증언을 하자 중국 정부가 직접 나서 할머니의 증언과 여러 기록을 바탕으로 난징 중심부에 유적 진열관을 마련했습니다. 

총 3000㎡ 규모로 1600여 점의 전시물과 680장의 사진이 생생하게 보존돼 있습니다. 당시 일본군이 난징에서 동양 최대 규모의 위안소로 운영했던 8개 건물 가운데 6곳을 온전한 형태로 개보수 했습니다. 


 
 

고 박영심 할머니의 임신한 모습 동상이 난징 리지샹 위안소 유적 진열관 마당에 세워져 있다. ⓒ 김종훈


중국 정부의 결단이 돋보입니다. 돌아보면 리지샹 위안소 유적진열관 설립까지의 과정이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앞서 언급했듯 총 면적이 3000㎡에 달합니다. 난징 최중심부와도 걸어서 10분 거리밖에 되지 않습니다. 1935년 김구 선생과 장개석 총통이 공식적인 회담을 한 중앙반점과도 걸어서 2분 거리입니다. 말 그대로 난징 중심에 위치한 금싸라기 땅입니다.

실제로 지금의 형태로 개관하기까지 10년이 넘는 시간이 소요될 정도로 논란이 길었습니다. 정부와 언론, 지역주민, 부동산 업자들까지 가세해 치열한 논쟁을 벌였습니다. 그러나 '역사를 바로보자'는 결정이 나자 모두 받아들였습니다. 그 결정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건 박영심 할머니의 증언입니다. 

중국 정부는 박영심 할머니의 증언을 토대로, 이후 우리 교과서에도 실린 할머니의 임신한 모습의 동상을 진열관 입구에 세웠습니다. 할머니가 생활했던 19번방까지 그대로 복원했습니다. 중국 땅에 세워진 진열관의 주인공이 우리 동포 소녀였다는 사실에 숙연해지고 미안해집니다. 

이 지점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중국 정부와 난징시는 이 지역 보존 결정을 내린 뒤, 치욕의 역사까지 기억하고 보존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2014년에 장쑤성(江蘇省)의 '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됐습니다. 위안부 유적진열관 관람은 당연히 무료입니다. 

잊으려한 한국

다들 기억하실 겁니다. 2015년 12월 28일, 당시 박근혜 정부는 마치 대단한 결단을 한 것처럼 한일 일본군 위안부 협상 타결을 발표합니다. 지원금 10억 엔(100억 원)을 받으면서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 양국은 '최종적이며 불가역적인 해결을 봤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러면서 '유엔 등 국제사회에서 위안부 문제로 상호 비난과 비판을 자제한다'고 약속했습니다.

 
 

이용수 할머니의 눈물 한일 외교장관 회담에서 일본군 위안부 협상이 타결된 지난 2015년 12월 28일 오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88) 할머니가 서울 마포구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에서 기자회견을 하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 이 할머니는 일본 정부가 피해자들에게 '보상'이 아닌 '법적 배상'을 해야 한다는 입장을 거듭 강조했다. ⓒ 연합뉴스


뒤늦게 소식을 접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 할머니는 "우리가 있는데도 정부가 이렇게 해결해선 안 된다"며 "나라가 없을 때도 아니고, 정부가 이렇게 창피스럽게 해결을 못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지적했습니다. 그러면서 이 할머니는 "싸우겠다"고 강조했습니다. 1918년 생인 이용수 할머니의 연세가 올해 아흔입니다. 나라를 잃었을 때 할머니는 위안부로 끌려갔고, 나라가 있을 때는 모욕을 당했습니다.

당시 우리 정부의 선택이 얼마나 졸속적이었는지 모릅니다. 피해자들의 의견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선택을 했습니다. 무엇보다 중국에서 아시아 최대 규모 리지샹 위안소를 개관할 때, 우리 정부는 최종적이며 불가역적이라는 위안부 합의안을 발표했습니다. 위안부 할머니들의 말처럼 '당시의 정부는 대체 어느 국민의 정부였을까' 묻고 싶을 뿐입니다. 

끔찍한 기억을 마주한다는 것

사실 리지샹 위안소 진열관 전체를 관람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닙니다. 내부 촬영을 금지할 정도로 충격적이고 섬뜩한 내용이 즐비합니다. 몇 장의 사진만 훑어도 일본이 난징을 점령하고 어떤 만행을 저질렀는지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특히 고 박영심 할머니가 1939년 17살 나이에 일본인 순경에게 속아 난징의 위안소로 끌려왔을 때 머물렀던 2호 건물 19번 방 앞에 서면, 참으로 형언하기 어려운 감정이 일어납니다. 

박 할머니는 그곳에서 3년 동안 머물며 하루에 많게는 서른 명의 일본 군인들을 상대해야 했습니다. 말을 듣지 않으면 일본 병사가 군도를 휘둘렀고 다락방 고문실에서 전라로 체벌을 당했다고 증언했습니다.


 
 

박영심 할머니와 위안부 소녀들 우측에 임신한 여성이 고 박영심 할머니다. 박 할머니 옆으로 불안한 얼굴의 위안부 모습과 가장 왼쪽에 밝게 웃는 군인이 매우 대조적이다. ⓒ 김종훈

 

박영심 할머니의 19번 방 고 박영심 할머니는 이곳 19번 방에서 3년간 생활했다. 중국 정부는 박 할머니의 증언대로 이곳을 복원했다. ⓒ 김종훈


할머니가 머물렀던 방에는 작은 화장대와 주전자, 찻잔, 세숫대야, 그리고 낡은 다다미 침상 위에 옷가지까지 그대로 재연돼 있습니다. 건너편에는 할머니가 리지샹 위안소 생활 이후 중국 원난성으로 끌려가 임신한 채 찍혔던 사진과 전라의 사진도 전시돼 있습니다. 당시가 1944년이었는데, 미군이 찍은 사진 속 박 할머니는 임신한 모습으로 두려움에 떨고 있습니다. 박 할머니 뿐 아니라 바로 옆 조선 여성들의 모습도 다르지 않습니다. 다들 지치고 두려운 모습입니다. 박 할머니는 '아기를 당시 포로수용소에서 유산했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진열관 내부는 위안부와 관련된 디테일한 증거품들까지 온전한 형태로 진열돼 있습니다. 특히 일본군에 배포된 '돌격 앞으로'라는 문구가 새겨진 콘돔이 충격적입니다. 콘돔 옆에는 연고 등이 당시 그 모양 그대로 전시돼 있습니다. 위안부를 정기적으로 검사했던 신체검사용 틀과 위안부를 훔쳐보는 일본 군인들의 사진까지 그대로 전시돼 있습니다. 직접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외면하고 살아왔는지.

충격과 공포, 분노 속에 할머니들의 흔적을 쫓다보면 어느새 살아남은 위안부 소녀들, 지금은 할머니가 돼 버린 소녀들의 증언이 이어집니다. 한국, 중국, 필리핀, 대만, 홍콩, 심지어 네덜란드에서도 위안부 소녀들이 끌려왔습니다.

가장 안타까웠던 건 진열관 끝자락에 자리한 '끝없이 흐르는 눈물'이라는 이름이 붙은 한 할머니의 조각상. 그 아래에는 '그녀의 눈물을 닦아달라'는 문구와 함께 마른 수건이 놓여있습니다. 리지샹 위안소 진열관에서 할머니의 눈물을 닦아주도록 수건을 준비한 건데, 아무리 닦아도 할머니의 눈물은 멈추질 않습니다.

이유는 분명합니다. 일본은 여전히 진심어린 사과를 하지 않고 있습니다. 지켜주고 나서주고 기억하고 행동해야 할 한국 정부는 2015년 12월 최종적이며 불가역적이라는 말도 안 되는 협상안이나 꺼내들었습니다. 지금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마르지 않는 눈물 리지샹 위안소 유적 진열관에 전시된 위안부 할머니의 마르지 않는 눈물, 아무리 닦아드려도 할머니의 눈물은 마르지 않는다. ⓒ 김종훈


살아남은 자들의 역할

1937년 12월 중국이 일본에 패한 뒤 난징은 한마디로 아비규환이었습니다. 일본은 무차별적으로 시민들을 학살했고, 그 숫자가 30만 명에 이른다고 중국은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과정 속에서 일본은 보다 효과적인 전쟁을 위해 중국 전역에 위안소를 세웁니다. 그 숫자가 40개가 넘었다고 합니다. 그곳을 채운 위안부들은 나라를 잃은 소녀들. 나라를 잃었다는 이유로, 정부가 제 기능을 할 수 없다는 이유로 수만 리를 끌려와 갖은 모욕을 당했습니다. 안타깝고 뼈아픈 역사입니다. 정부가 제대로 지켜주지 못해 이런 참상이 벌어진 겁니다.

중국 정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무 것도 하지 못했습니다. 난징에서 패하자 급히 충칭으로 수도를 옮겼습니다. 버티기에도 급급한 상황이었습니다. 우리 임시정부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역시 창사로, 광저우로, 류저우로, 다시 치장을 거쳐 충칭으로 가게 됩니다. 

그 후에 중요한 차이가 발생합니다. 일제가 패망하고 중국은 어떤 대처를 했습니까? 정부가 나서서 피해자들의 증언을 최대한 듣고, 시민들에게 '잊어선 안 된다'며 의무적으로 가르치고 강조합니다. 시민들은 이런 현장을 찾아 끊임없이 배우고 나눕니다. 

반면 과거 우리 정부는 제대로 된 위안부 관련 진열관 하나 없이, 소녀상 하나 세우는 것도 일본의 눈치를 살폈습니다. 2015년 12월에는 말도 안되는 협상안 들고와 할머니들을 모욕했습니다. 이 때문에 협상이 타결된 날부터 현재까지 구 일본대사관 소녀상 옆에서 뜻있는 대학생들이 모여 2년 6개월이 넘도록 노숙농성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정부가 지켜주지 않으니 학생들이 나서서 할머니들을 지키겠다고 나선 겁니다.

<How are you 임정> 취재팀이 가장 안타깝고 아쉬웠던 지점입니다. 감추고 없앤다고 사라지는 게 아닙니다. 아픈 기억일수록 더 기억하고 기록해야 이런 아픔이 반복되지 않는 겁니다. 할머니들의 시간이 얼마나 남지 않았다는 걸, 이대로 할머니들이 가버리면 다 끝 아니냐고 당시 정부는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2017년 7월 6일 기준으로 위안부 피해자 생존자는 27명에 불과합니다. 불과 며칠 전 22세 때 고향 통영에서 필리핀 등으로 끌려가 고초를 겪었던 김복득 할머니가 별세했습니다. 할머니들의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중국은 기억하려했고 우리는 잊으려했습니다. 대한민국이 중국에 배워야 할 가장 중요한 한 가지입니다. 고 김복득 할머니의 명복을 빕니다.

 

[1화] 대한민국이 시작된 곳엔 아무것도 없었다

[2화] 임시정부 기초 닦은 신규식, 세 번 자살 기도한 사연

[3화] 윤봉길 '폭탄 의거'에 대해 잘못 알고 있는 몇 가지 사실들 

* 본 기획물은 언론진흥재단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난징 리지샹 위안소 유적진열관 임정투어 정보
1. 찾아가는 법

난징 지하철 2호선과 3호선이 동시에 통과하는 대행궁(Daxinggong/大行宫)역 1번 출구로 나와야 한다. 출구를 나와 뒤를 돌면 100m 앞에 1935년 김구 선생과 장개석 총통이 회담했던 중앙반점(中央饭店/CENTRE HOTEL)이 있다. 그곳에 서서 건너편을 바라보면 'Bank of China'가 있고 그 골목길 끝에 리지샹 위안소 유적진열관이 있다. 정문으로 내려가는 길에 박영심 할머니의 동상과 위안부할머니들의 사진을 모아놓은 벽면을 확인할 수 있다. 입장시 반드시 신분증이 필요하다. 여권을 미리 준비하자. 

2. 구글지도 활용법

'南京喜相逢婚礼主题会馆'를 입력하면 정확한 위치를 특정할 수 있다. 김구 선생이 회담한 중앙반점(中央饭店)을 지도에 입력한 뒤 이동해도 쉽게 찾을 수 있다. 두 곳이 바로 지척이다. 리지샹 위안소에 들어가면 영어가 어느 정도 가능한 중국 관리인이 나오는데, 앱을 통해 현장에서 한국어로 된 설명을 들을 수 있다.

3. 구글지도 위치

https://goo.gl/t1GZV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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