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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2018.06.28 22:29 수정 2019.06.25 15:30
뜨거운 사람 신규식

붉은 카네이션을 올렸습니다. 사실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예관 신규식 선생에겐 어떤 꽃을 드리면 좋을까. 뒤늦게 예관 선생의 삶을 접하고 나니 하얀 국화를 올려선 안 될 것 같았습니다.

예관 신규식 선생, 아마 많이들 모르실 겁니다. 저희 <How are you 임정>팀도 이번 프로젝트를 준비하며 처음으로 알게 됐습니다. 예관 선생은 19세기 말에 태어나 20대 초반에 신식군인을 양성하려고 설립한 육군무관학교를 졸업한 뒤 육군보병 참위(위관 계급)가 되었습니다.

예관 선생은 청년시절부터 한마디로 불의에 항거한 뜨거운 사람이었습니다. 1905년 11월 17일의 일입니다. 대한제국과 일본 사이에 한일협상조약, 다른 말로 '을사늑약'이 체결됐습니다. 일제는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고 통감부를 설치해 대한제국의 내정을 장악했습니다.

군인이었던 예관 선생은 분노했습니다. 의병을 일으키려 했지만 실패했습니다. 아무리 궁리해도 망국을 향해 치닫는 나라를 위해 군인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습니다. 선생은 결국 자신의 뜻을 보이려고 극단적인 선택을 했습니다. 독을 마셨습니다. 1차 자살 기도입니다.
 

상하이 망명 당시의 신채호, 신석우, 예관 신규식 선생 ⓒ 독립기념관


천운인지 예관 선생의 음독자살은 가족들이 빨리 발견해 실패했습니다. 대신 오른쪽 시신경에 문제가 생겨 시력을 잃었습니다. 예관 선생은 '나라가 망했는데 세상을 어찌 바로 볼 수 있겠냐'며 자신의 호를 아예 '흘겨본다'는 뜻의 예관(睨觀)으로 지었습니다. 몇 장 남지 않은 사진에서 예관 선생을 접할 때마다 확인할 수 있는 선생의 선글라스 같은 짙은 안경과 고풍스런 수염이 더욱 남다른 이유입니다.

선생은 1차 자살 기도 후 육군 부위로 승진합니다. 그러나 1906년 일제에 의해 군대가 강제 해산되자 부하들을 이끌고 저항합니다. 하지만 압도적인 전력차로 패하고 예관 선생은 결국 군복을 벗게 됩니다.

그렇다고 조국을 생각하는 선생의 마음이 줄어들진 않았습니다. 오히려 예관 선생은 대종교에 입교, 애국계몽 영역으로 활동의 폭을 넓혔습니다. 1910년 8월 29일 일본은 한국을 합병해버립니다. 예관 선생은 경술국치 소식에 집에서 다시 독을 마십니다. 선생은 때마침 방문한 대종교 종사 나철에게 발견돼 구조됐습니다. 삶의 끝자락에서 다시 한 번 기적적으로 돌아온 겁니다.

망해버린 조국, 국제도시 상하이로 떠나다

두 번이나 목숨을 내던졌지만 망국을 피할 길은 없었습니다. 망국 1년 뒤, 선생은 중국 상하이로 망명합니다. 당시 상하이에서는 한국인 독립운동가들의 활동이 전무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선생은 과감히 국제도시 상하이로 독립운동의 길을 떠난 겁니다.

선생은 강직하고 불같은 성품을 지녔지만 머리 또한 기민했습니다. 어떻게 싸워야 효과적일지 누구보다 정확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선생은 중국으로 망명한 뒤 중국의 혁명가들과 친분을 쌓았습니다. 중국의 국부 손문(孫文)과도 연을 이어 청조를 무너뜨린 신해혁명에도 가담했습니다. 유일한 한국인 참가자입니다. 예관 선생은 훗날 임시정부 2대 대통령이 되는 박은식 선생과 뜻을 같이해 잡지를 발간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선생은 상하이 남창로 100농 5호 2층 단칸방에 살면서 건너편 집에 살던 진독수(陳獨秀) 선생과도 가까이 지냈습니다. 진독수 선생은 중국 공산당의 창시자이자 유명한 사상가입니다. 1915년 <신청년>을 창간하면서 중국 전역에 근대 사상계몽 운동을 일으킵니다. 이 잡지가 창간된 곳이 바로 예관 신규식 선생이 살았던 남창로 100농 5호 그 건물입니다.
 

신규식 선생이 거주했던 방에서 바라본 진독수 선생 집 ⓒ 김종훈


선생은 이러한 친분을 기반으로 한인 학생들이 더 나은 교육과 훈련을 받을 수 있도록 가교 역할을 합니다. 100여 명의 학생들이 여러 군관학교 등에서 교육을 받게 됩니다. 이렇게 교육받은 이들이 훗날 독립운동의 구심점이 돼 활동을 잇게 됩니다.

무엇보다 선생이 상하이에서 닦아놓은 기반이 자연스레 한국 독립운동가들이 상하이에서 활동하는 계기가 됩니다. 상하이가 점차 항일 독립운동의 중심지로 자리잡게 되고 여기 모인 애국지사들이 뜻을 모아 마침내 1919년 4월 11일 상하이에 한민족 역사상 처음으로 민주공화정인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세우게 되는 겁니다.

선생은 임정이 출범한 해에 법무총장에 임명되고, 1921년에는 국무총리 겸 외무총장자리까지 오릅니다. 이때 예관 선생은 외교사절 자격으로 광저우로 가 중국의 국부 손문(孫文)의 광동 호법정부을  방문합니다. 이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중국 정부에 나라 대 나라로 인정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외교력이 온전히 빛을 본 순간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선생의 뜻과 달리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격랑에 빠져듭니다. 임정 수립 후 꾸준히 문제됐던 내부 분열이 극단으로 치달은 겁니다. 특히 선생이 강조했던 '외교독립론'이 빛을 보지 못했습니다.

1922년 아시아 태평양 지역의 현안을 논의하는 워싱턴회의가 열렸지만 정작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초대받지 못합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 이승만이 현장에 갔지만 미국은 한국 대표단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이승만은 그해 대통령 자리에서 쫓겨납니다. 이후 선생의 지병도 커졌다고 합니다. 선생의 외교독립론이 임시정부를 분열시켰는다는 자책감에 우울증과 불면증으로 고통받았다고 합니다. 선생은 그해 9월 25일 운명합니다.

선생은 돌아가시기 한 달 전인 1922년 8월 하늘을 바라보며 동료들에게 "나는 아무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습니다. 그럼 잘들 있으시오. 우리 친구들이여. 나는 가겠소. 여러분들 임시정부를 잘 간직하고 삼천만 동포를 위하여 힘쓰시오. 나는 가겠소. 2천만 동포를 위해 힘써주시오"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이것은 선생의 마지막 유언이었습니다. 이날 이후 선생은 식사와 약, 말을 끊어버렸습니다. 의형제를 맺은 동생 박찬익이 찾아와 '이래선 안 된다'며 만류해도 아무 말도 못 들은 것처럼 가만히 천장만 바라보았다고 합니다. 9월 25일 선생은 결국 숨을 거둡니다. 마지막 순간, 선생의 입에선 '정부... 정부...'란 말만 가늘게 새어 나왔다 합니다. 선생이 떠나는 날 상하이에는 굵은 소나기가 내렸습니다.

"예관 선생은 떠났지만 그가 살았던 곳은..."

2018년 6월 20일 상하이에는 폭우가 쏟아졌습니다. How are you 임정팀은 이날 예관 신규식 선생이 살았던 상하이 남창로 100농 5호를 찾았습니다. 선생이 살던 집은 그대로였습니다. 100년이 흘렀지만  전체적인 형태가 그대로였습니다.
 

신규식 선생과 진독수 선생의 집이 서로 마주하고 있는 거리. 사진 왼쪽 신규식 선생 집에서 중국 계몽 잡지 <신청년>이 발간됐다. ⓒ 김종훈


임정팀은 비를 맞은 채 밖에서 서성였습니다. 그때 예관 선생이 살던 집에 사는 중국인 아주머니 한분이 저희를 반갑게 맞이해주셨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살고 있는 집 2층 한켠이 예관 선생이 살았던 곳이라며 저희를 이끌고 방문 앞까지 안내해줬습니다.

삐거덕거리는 나무 계단과 먼지 소복한 난간, 어두침침한 복도까지 선생이 살았던 곳은 그대로였습니다. 임정팀은 뭐라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일어 그저 가만히 서서 선생이 살던 방문이며 복도며 계단을 매만졌습니다.
 

신규식 선생이 살았던 집 계단. 100년 전 모습 그대로다. ⓒ 김종훈


선생의 집을 나오니 빗줄기는 더욱 강해졌습니다. 그래서 더욱 아쉬웠나 봅니다. 임시정부의 기틀을 마련했으며 외무총장과 국무총리 대리까지 맡으신 분의 거처치곤 너무나 초라했습니다. 선생의 집에 거주하는 중국인 아주머니의 도움으로 자세히 살필 수 있었지만 선생의 거주지 역시 대한민국 임시정부 첫 번째 두 번째 청사처럼 아무런 표식조차 없었습니다.

다음날(6.21) 헛헛한 마음 달래며 선생의 쑹칭링 능원(구 만국공묘)을 찾았습니다. 1993년 선생의 유해는 고국으로 이장됐지만 그전까진 70년이 넘는 시간을 여기 모셔져 있었습니다. 지금은 만국공묘 끝자락에 머릿돌만 남아 있습니다. 저희는 선생의 마지막 길을 생각하며 선생의 묘에 붉은꽃을 올렸습니다.
 

쑹칭린 묘역에 있는 신규식 선생 묘비. 1993년 이장 전까지 선생은 중국 땅에서 70년 넘게 잠들어 있었다. ⓒ 김종훈


선생의 불 같았던 일생,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던 의지. 우리가 잊었던 예관 선생은 우리에게 기억되고 기억돼야할 인물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How are you 임정팀이 예관 선생께 올린 붉은꽃을 선생도 저 하늘에서 좋아했으면 좋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오마이TV 김종훈, 정교진, 김혜주 기자, 최한솔 시민기자)

* 본 기획물은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여행 정보

1. 예관 신규식 선생 거주지 가는 법

초행길이면 찾기가 다소 어려울 수 있다. 지도에 정확하게 표기한 뒤 이동하는 것을 추천한다. 선생의 집은 상하이 지하철 13호선 회해중로역(淮海中路/Huaihai Middle Road)과 1호선 황피남로역(黃陂南路/Huangpi South Road) 중간에 있다. 무엇보다 선생의 집은 임시정부 첫 번째 청사 추정지인 서금이로와 두 번째 청사 추정지인 회해중로 H&M 건물, 윤봉길 의사와 김구 선생이 마지막 인사를 나눈 원창리 13호와 모두 10분 거리 안쪽이다.

구글지도 활용법

'上海市 黄浦区 南昌路 100弄 5号'를 지도에 입력한 뒤 보면서 이동하는 것을 추천한다. 골목 안쪽에 위치한만큼 '남창로 100농'을 유의하며 걸어야 한다. 발견하는 순간 짜릿한 감정이 인다. 무엇보다 선생의 집은 진독수 선생이 <신청년>을 발행한 곳, 중국인들도 심심치않게 사진을 찍고 가곤 한다. 방향을 어느쪽으로 잡든 선생의 거주지로 향하는 길목에, 임시정부와 관련된 다양한 유적지를 동시에 만나볼 수 있다. 특별한 표기는 없으니 유의해야 한다.

2. 예관 신규식 선생 묘 가는 법

선생의 묘는 만국공묘, 지금의 쑹칭링 능원에 모셔져 있다. 상하이 지하철 10호선 송위안루역(宋园路) 2번 출구로 나와 좌측으로 200m 정도 이동한 뒤 다시 우회전해서 100m 정도 이동하면 정문이 보인다. 2번 출구 뒤편에 꽃집이 있다. 임시정부 2대 대통령을 지낸 박은식 선생의 묘를 비롯해 한국인 묘로 확인됐거나 추정되는 14기의 묘도 함께 있다. 입장 전 미리 꽃을 준비하면 더 좋다. 다만 쑹칭링 능원은 경건한 장소인만큼 슬리퍼를 신었을 때 입장이 제한될 수 있다. 유의해야 한다.

구글지도 활용법

아래 주소 '上海市 陵园路 21号 宋庆龄陵园'를 입력해 이동하면 쉽게 찾을 수 있다. 예관선생의 거주지인 남창로 100농 앞에서 택시를 이용해도 원화로 1만 원 이내에 도달가능한 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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