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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친일파 척결은 그 첫 기회에서 좌절한 이후 수차례의 기회가 있었지만 모두 무산되고 말았다. 다시 시작된다 해도 다시 탄력을 받기는 어려울 것이다. 또 이미 친일의 전면에 있었던 이들의 후손으로 가득 찬 이 나라 지도층의 구조를 생각하면 더욱 더 암담하다.

일본에서는 어려울 때면 가미가제를 생각한다는 말을 서슴없이 하는 총리가 탄생한다. 또 정신대의 기록을 싣는 것은 마치 화장실이야기를 역사에 싣는 것 같아서 실을 수 없다는 역사학자가 지도층에 있는 일본. 과연 그들은 용서받을 수 있는 이들인가.

난징은 그 일본이 근대사를 가장 확실하게 도륙(屠戮)한 흔적이 있는 곳이다. 그곳에 그 역사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아낸 중국계 미국인인 젊은 여성학자 아이리스 장의 기록인 '난징대학살'을 들고 간다.

일본인은 사절합니다

내가 난징에 들어간 것은 우한에서 출발해 창지앙(長江)의 중류를 지나서 상하이에 닿는 여객선을 통해서다. 조금 초라하게 느껴지는 강의 접안대를 나와 시내로 들어가는 버스에서 느끼는 난징 시내의 풍경은 초라한 반면에 깨끗하다는 것이다. 다른 도시들이 급속한 도시화와 더불어 현대적인 색채로 다듬어진 반면, 난징은 누추한 도시의 풍경속에 깨끗하게 정돈된 풍경을 갖고 있다.

버스를 통해 난징역 앞으로 나온다. 다음 기차를 예매하고, 숙소를 잡기 위함이다. 그 역 앞에서 호객을 하는 이들의 가장 특징적인 것 중에 하나는 우리보고, 어느 나라사람이냐고 묻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는 것이다.

다른 도시에서 쉽게 볼 수 없는 특징이다. 긴장해서 그들은 우리에게 국적을 묻고, 한국인이라는 말에 안심을 하고, 호텔을 소개하기 시작한다. 그들에게 '일본'이라는 국가가 주는 느낌이 여전히 살아 있다는 것을 실감하게 한다.

어느 나라도 상식을 초월하는 잔악한 역사는 많이 갖고 있다. 미국은 '운디드 니'에서 인디언들의 머리에 총탄을 날렸고, 영국은 인도에서, 프랑스나 독일도 수없는 국가에서 순수한 이들에게 총탄을 날렸다.

우리나라도 베트남의 정글에서 이유도 모르는 분노속에 총알을 뿌렸던 역사가 있다. 그 죄업과 죄과의 크기를 가눈다는 것은 의미가 있겠는가만 일본이 난징에서 행한 만행은 인간이 얼마나 잔악해질 수 있는 가를 생각하게 한다.

그리고 아이리스 장의 르포로 채워진 기록 '난징대학살'은 그 생생한 기록이다. 난징 대학살이란 1937년 당시 국민당 정부의 수도인 난징(南京)을 탈환한 일본군이 8주간에 걸쳐 약 30만 명을 학살하고, 8만여 명의 여성을 강간한 사건이다.

한 도시에서 8주간에 30만명이 살해됐다는 것의 함의는 무엇일까. 그것도 이미 저항력을 잃어버린 이들에게 행한 그들의 행위의 잔악성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 책은 철저한 현장 답사와 광범위한 인터뷰, 꼼꼼한 자료 수집을 통해 아직까지도 일본이 애써 감추려 하는 은폐된 역사의 한 부분을 발굴해낸 생생한 보고서다.

책에서 기술되는 일본군들의 살인기술은 가히 상식을 초월한다. 기관총으로 쏜 것은 관용을 베푼 경우라고 봐야 한다. 산 사람을 나무에 묶어놓고 총검훈련 삼아 죽이기도 했고 혀에 쇠갈고리를 걸어 매달아놓거나 군용견의 먹이로 삼기도 했다. 2만∼8만의 여인들이 강간당하고 사지를 절단 당했다.

무카이 도시아키 소위와 노다 다케시 소위는 100명의 목을 누가 먼저 베나 내기를 했다. 무카이가 106명, 노다가 105명을 베고도 목 베기 시합을 계속하고 있다는 내용을 일본 신문은 '100인 목베기 대접전' '목베기 연장전'이란 제목으로 사진과 함께 보도하는 광기를 연출했다.

난징, 밝음과 어둠이 교차하는 역사

중국 7대 고도 중에 하나인 난징은 서기 3-5세기에 동오(東吳)를 시작으로 동진(東晉), 송(宋), 제(齊), 양(梁), 진(陳)의 6개의 수도역할을 했고, 남당(南唐), 명(明)초 모두 이곳에 수도를 건설했다. 1851년 태평천국의 난 때 난징은 태평천국 교도의 수도로 11년 동안 있었다.

1911년 손중산(孫中山 쑨원)은 신해혁명(辛亥革命)을 통해 청조(淸朝)를 무너뜨리고, 난징(南京)에 임시정부를 성립하여 2000여 년의 봉건통치를 마감했다. 1927년 국민당(國民黨)은 난징(南京)을 중화민국(中華民國)의 수도로 삼았다. 하지만 중일전쟁 당시 일본군에게 점령당하며 대학살의 참극을 겪었고, 1949년 4월에 중국 인민해방군이 들어와 지금의 체제를 만들었다.

여름에는 40도에 육박하는 기후로 인해 중국내 가장 더운 도시 중에 하나로 꼽히는 곳. 난징은 가장 가까운 역사의 주인공이자 중국 건국의 아버지로 불리는 쑨원(孫文)에 대한 깊은 사랑을 가진 도시였다. 사실 중국 대도시 가운데 중산의 뜻을 기리는 '중산공원'이 없는 곳이 없을 만큼 중산은 중국인들에게 사랑받는 이다. 특히 난징은 베이징 향산에서 쉬다가 이곳의 중산능에 몸을 누인 쑨원의 묘가 있는 도시여서 그 사랑이 더하다.

중산은 봉건왕조를 무너뜨린 초대 대통령이지만, 그 묘가 능(陵)으로 불리는 이상한 위치에 있다. 실제로 중산능은 걸어서 올라가는데 수차례 뒤를 돌아보게 할 만큼 힘들고 고된 길이다.

중산은 1929년 베이징 향산 벽운사에서 이곳으로 왔다. 개인적으로 그의 인생역정에 깊은 관심이 없다. 그에게는 청조의 멸망이라는 열망은 있었지만, 세계적인 흐름을 보는 눈은 부족한 지도자가 아닌가 싶다. 또 그는 일본을 상당히 존중했지만 그가 죽은 지 10년도 안돼, 아내와 딸들이 일본군에게 강간당하고, 사내들이 참변을 당하는 모습을 지켜봐야했다.

끝이 없을 듯한 계단을 올라서 만나는 쑨원 유해를 만나고 오는 길에는 밍시아오링(明孝寺)에 들린다. 이곳은 명나라 태조 주원장(朱元璋)의 능묘다. 사실상 한족정권의 마지막 왕조가 된 명을 세운 주원장의 묘는 상석과 우러러진 나무들이 조화를 이루며 600여년의 시간을 이야기해주고 있다.

빈농 출신으로, 17세에 고아가 되어 탁발승(托鉢僧)으로 지내다가 홍건적의 부장 곽자흥(郭子興)의 부하가 되면서 두각을 나타내어 그는 원조를 개웠다. 그는 몽고족의 왕조인 원(元)의 강남(江南) 거점인 난징을 점령했다. 그 뒤 각지의 군웅들을 모두 굴복시켜 명나라를 세웠다. 지금은 그의 기상을 느낄 수 없지만 내심 한족이 부흥하는 이 시대를 기꺼워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역사 수레 바퀴아래 깔렸던 난징인들

계수나무꽃의 냄새가 자욱한 시내를 지나, 어둠이 내리는 현무호 공원에 들른다. 쫄랑대며 호숫가의 서정을 즐기는 나에게 한 점쟁이 아주머니가 온다. 너무 먼 곳에서 온 것을 알아선지 좋은 점괘로 미래를 축복해준다.

사실 기자 세대는 한국전쟁 후에 태어나서 큰 어려움을 겪어보지 않았다. 내 형 세대까지만 해도 기괴한 역사의 골짜기인 80년 광주를 겪었지만 우리 세대는 어떻든 날아다니는 총탄 앞에 머리를 들이밀 일은 없었다. 그 아주머니의 축복이란 우리 세대에 그런 위험은 없다는 뜻일까. 사실 역사에서 수십, 수백년 된 평화는 극히 드물었다.

난징의 사람들은 특히나 그랬다. 홍수전이 이끈 태평천국 교도들이 난징을 도읍으로 삼았을 때도 수도라는 상황에 기뻐하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결국 그들은 태평천국 자체의 분열과 밀려드는 서구열강군의 난징 복귀 속에서 피를 흘려야했다.

인간에게 결코 자비심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했던 시간. 그리고 그 피의 역사에 절정은 일본군이 만든 것이다. 나치조차 치를 떨었다는 대학살 앞에서 희망이 있다는 사실은 의외로 독일인 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필자는 말해준다.

난징판 '쉰들러 리스트'일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난징의 광란 당시 '안전지대'를 만들어 20만∼30만 중국인들의 인명을 구한 독일인 사업가 욘 라베이다. 아이리스 장은 욘 라베의 모습을 그려 절망속에서도 희망이 있음을 말한다.

사실 난징은 여행을 위한 도시는 아니다. 중국인들에게는 근대사의 격전지로 기억하고 있는 측면이 많다. 긴 시간 동안 수로를 했지만 강의 하단에 있는 상하이에 경제적 부흥지를 양보하고, 베이징에 정치적인 수도를 양보한 이상 난징의 광휘는 바라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그곳을 떠나며, 짧은 시간밖에 머물지 않은 나에게는 이상한 감회가 생겨났다. 다름 아니라 나의 고향같다는 느낌. 그것은 강자와 폭압앞에서 무너질 수 없는 숙명을 가진 이들의 공감일지 모른다. 또 그 쓰러짐 속에서 다시 무엇인가를 만들어내야 한다는 것.

그 참혹한 날들이 지나간 후 난징 사람들은 어떠했을까. 가족의 한둘은 잃어버리고, 아내와 딸들은 이미 일본군의 몸에 휩쓸려갔던 기억을 간직해야 하는 괴로움. 어떤 일본인들은 그곳을 지나며 자신을 홀대하는 이들에게 불만을 표시할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그들에게 그 역사를 대면해주면 어떤 느낌일까.

폭염의 도시를 떠나, 상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앞에서 한 여인이 눈물을 흘리기에 조심히 말을 걸었다. 여인은 난징에 있는 대학에서 강사를 하는 남자친구와 주말 연애를 마치고, 자신이 사는 지난으로 가는 길이었다. 결혼을 해도 살 집을 구하기 어려워 공방이 나오기 기다린다는 이 젊은 연인. 하지만 여인은 자신과 더불어 지금 세대 남자의 선택 기준은 사랑보다는 돈과 집이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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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케이아이테크놀로지 상무. 저서 <삶이 고달프면 헤세를 만나라>, <신중년이 온다>, <노마드 라이프>, <달콤한 중국> 등 17권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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