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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월 25일 서울지역 전체 540개 초등학교엔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 선거운동'을 조장하는 공문이 일제히 뿌려졌다. A4 용지 두 장으로 된 이 공문을 보낸 곳은 서울초등교감행정연구회(회장 오모 교감, 아래 교감회). 수신자는 초등학교 교감과 한국교총 분회장이다.

"한나라당 후보 당선 팔 걷어부쳐야"

▲ 학교 예산으로 조직을 운영하는 서울초등교감회가 '이회창 지지' 회원 가입을 종용하는 공문을 각 학교에 보냈다.
ⓒ 윤근혁
'교육가족회 회원가입운동'이란 제목의 이 공문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적힌 회원가입서가 덧붙여 있다.

"한나라당 이회창 대통령 후보가 교원정년을 65세로 원상회복하겠다고 하였습니다. 공약을 내건 후보가 당선되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팔을 걷어 부치고 나서야 합니다."

공문을 보낸 교감회는 서울지역 교감 대부분이 가입해서 활동하는 서울교총(회장 박희정) 직능별 산하기구며 서울교총은 한국교총(회장 이군현) 지역조직이다.

이 교감회와 교장회 등 관련 단체의 회비와 운영비는 올 11월 밝혀진 서울교육청 자료에 따르면 학교 예산에서 빠져나가고 있다.

학생에게 써야 할 학교 운영비를 빼내 자체 조직을 운영하는 교감회가 해괴한 교원 '정치활동'을 시작한 것이다.


교감 권위 이용 모든 교직원 동원

이 공문은 "모든 교직원이 (교총)교원가족회 회원 가입운동에 참여하여 (교사 한 사람당) 10명 이상의 가입회원 서명을 받으면 서울교총 직원이 수거할 예정"이라 적고 있다. 이번 일은 교감 권위를 이용 모든 교직원을 동원하려고 한다는 점에서 충격을 주고 있다.

확인 결과 교육가족회는 서울교총이 교원정년 환원을 위해 급조한 선거 대비 특별 모임이었다. 교감회는 이 공문에서 교육가족회 회원 가입 대상으로 '학부모와 제자, 가족' 등을 꼽았다. 학부모에게까지 회원가입을 종용하면서 공적 기구인 학교를 활용하려는 것으로 분석된다.

이 공문에 따라 일부 초등학교 교장과 교감은 교사들을 동원, 회원모집 활동을 벌이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특정 후보 선거운동에 직접 나선 셈이다. 서울 ㄴ초등학교의 한 교사는 "수업을 하고 있는데 교육가족회 회원 가입 용지가 와서 깜짝 놀랐다"고 말했다.

서울 ㄱ초등학교도 28일 하루 종일 회원가입 용지를 교사들에게 돌렸다. 이 학교 교감은 전화 통화에서 "한국교총에서 하는 일인데 한나라당을 지지하면 어떠냐"며 "정년환원만이 교육이 살길"이라고 떳떳하게 말했다.


"생각할 수 없는 부끄러운 일"

▲ 공문과 함께 첨부한 서울교총의 교육가족회 가입서에서 교감회는 "이회창 후보 당선 위해 팔을 걷어 부치자"고 적었다.
ⓒ 윤근혁
이런 사실이 지난 27일 전교조 서울지부(지부장 김재석)에 의해 알려지자, 선거관리위원회와 서울시교육청은 28일 조사에 착수했다.

서울시교육청 이효종 초등교육과장은 "상식적으로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 벌어졌다"고 말했다. 선거관리위원회의 한 관계자도 "교감 단체가 학교로 공문을 보낸 사실만으로도 문제가 된다"고 지적했다. 현행 공직선거및선거부정방지법은 '공무원은 선거운동을 할 수 없다'(제 60조 1항)고 돼 있다.

이 공문을 받은 뜻 있는 교장과 교감들도 '기가 막히다'는 표정이다. 박모 교장(서울 ㄴ초)은 "지금 한국교총이 정신이 있느냐, 같은 교사로서 부끄럽다"고 말꼬리를 흐렸다.

전교조 서울지부 김석근 사무국장은 "교감·교장회 지도부가 특정 교원단체와 결탁 학교를 한나라당 선거운동판으로 만든 데 대해 경악한다"며 '관계자 엄중 문책'을 촉구했다.

한국교총과 <조중동>의 정치활동
<긴급진단> 교감회와 교총의 해괴한 이회창 지지운동

11월 28일 새벽 1시 20분. 전교조 사무실엔 전화가 한 통 걸려 왔다.
전화기에서 40대 남자의 떨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몇 번을 더듬거리더니 다음처럼 말했다.

"저…. 선생님들한테는 죄송한데요. 제가 초등학생 자식이 있는데 선생님들이 한나라당을 찍으라고 하면…. 전교조가 그래도 되는 건가요?"

목소리는 담임 앞에서 주눅든 어떤 노동자 가장의 '순진한 말투' 같았다. 그는 "속이 상해서 이렇게 밤늦게 전화를 하게 됐다"는 말도 덧붙였다.

물론 그는 전화를 잘못 걸었다. 교원단체라는 말에 전교조로 전화하긴 했지만 번짓수가 달랐다.

한국교총 산하 단체인 서울교총과 교감회 '공문'이 말썽을 일으키고 있다. '이회창 후보 당선을 위해 팔을 걷어 부쳐야 한다'는 말이 적힌 이 공문이 대선운동 시작과 함께 각 학교로 뿌려진 것이다.

교사의 정치활동은 우리 시대의 과제다. 하지만 이 활동도 논리와 이성의 바탕 속에서 진행돼야 한다. 왜 어느 정당과 어느 정치사상을 지지하는지 이유가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그런데 교육시장화 속에 희생된 한 초등학생을 보면서도 '정년환원'이란 논거만 내세우는 게 과연 가당키나 한 일일까.

이런 소식을 전해들은 학부모는 교사 일반을 과연 어떻게 생각할까. 이런 불법 공문이 세상에 알려졌는데도 역시 조선·중앙·동아는 28일 현재 모른 척하고 있다. 올 초 '특정신문 구독자를 학교운영위원으로 세우자'는 몇몇 교사의 내부 서신까지 문제삼던 태도와는 딴판이다. 더 이상 말해 무엇하랴. 족벌신문을.

문제는 정치활동을 하겠다며 나선 일부 교원단체다. 우리는 유신시대 '유신문화'를 홍보하고 '공화당' 선거운동까지 나서야 했던 슬픈 교원정치활동의 역사를 갖고 있다.

한국교총은 또다시 교사를 욕보이려는 해괴한 정치활동을 당장 걷어야 한다. 최소한 이 땅의 교사들이 학부모들의 웃음거리는 되지 말아야 할 일 아닌가.
/ 윤근혁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주간 <교육희망> 328호(news.eduhope.net)에 실은 내용을 깁고 고쳐서 다시 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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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에서 교육기사를 쓰고 있습니다. '살아움직이며실천하는진짜기자'가 꿈입니다. 제보는 bulgom@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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