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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우디 아라비아 왕세자의 편지
지난 16일, 미국 유력 일간지 중 하나인 <달라스 모닝 뉴스>(The Dallas Morning News)에는 색다른 전면광고가 하나 실렸습니다. '야자수 아래 두 개의 칼이 교차하고 있는 문양'과 한 통의 편지로 이루어진 이 광고의 수신자는 미국 대통령, 발신자는 압둘라 빈 압둘아지즈 알-사우드(Abdullah bin Abdulaziz Al-Saud) 사우디 아라비아 왕세자였습니다.

맨 아래에는 '사우디 아라비아 국민' 명의로 되어 있으며 그 바로 아래에 '테러리즘에 대항하는 동맹국'이라는 수식어와 함께 사우디 아라비아 대사관의 웹사이트 주소(www.saudiembassy.net)가 나타나 있습니다. 한 가지 더 특이한 점은 16일자 신문임에도 불구하고 그 편지의 발신일은 그보다 앞선 9월 10일로 기재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미국민들에 대한 테러리스트의 공격 1주기 추모식 전야에 즈음하여"로 시작하는 이 글은 지난 9.11 테러에 대한 깊은 애도의 뜻을 표하고 있습니다. 또한, 글 곳곳에서 미국민들의 용기를 칭송하고 테러리즘은 완전한 악이라는 의견에 동의하고 있기도 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젊은 사우디 국민들 일부가 가담한 것에 대해 사우디 국민들이 고통을 느끼고 있다"는 완곡한 표현을 통해 유감을 나타내는가 하면, "이 악과 싸우고 그 뿌리를 근절시키는 데 최대한의 노력을 다하겠다는 의지와 결심을 천명한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더불어 "우리는 테러리스트에 맞서 맹렬하고 냉혹한 전쟁을 벌이는 데 있어 독자적으로 또는 공동으로 미국이 이끄는 국제적인 연합과 함께 행동할 것"이라면서 "당신(부시)의 협력과 지도력으로 새로운 세계가 세계무역센타의 파편에서 빠져 나오기를 희망한다"고 글을 맺고 있습니다.

스스로를 한 국가의 왕세자이자, 부수상 그리고 방위군 총사령관(Crown Prince, Deputy Prime Minister, and Commander of the National Guard)으로 밝힌 그가 왜 외국 대통령에게 보내는 편지를 외국신문에 공개적으로 광고하게 되었을까요?

▲ 사우디 아라비아 지도
굳이 '사우디 아라비아'가 중동국가임을 상기하지 않더라도, 이 글은 통상적인 수준의 애도문을 넘어서는 표현들이 많이 눈에 띕니다. 특히 사우디 아라비아가 그 동안 국제사회에서 보인 행동으로 볼 때 여러 가지 석연치 않은 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편지의 비밀은 무엇일까요?

첫째, 이 글의 전체적인 맥락은 사우디 아라비아가 미국의 대 이라크전을 적극 지지하고 있는 듯 보입니다. 그러나 불과 한 달 남짓 전인 8월 7일, 미국의 이라크 공격계획을 둘러싼 찬반논란이 미국 안팎에서 더해가고 있었을 때 사우디 아라비아 정부는 사우드 알-파이잘 외무장관의 기자회견을 통해 "미국이 이라크를 공격할 경우 사우디 영토 이용을 절대 허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힌 바 있습니다.

둘째, 사우디 아라비아가 미국 혹은 미국 대통령에게 이런 편지를 보낼 만큼 9.11 테러 응징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었나 하는 점입니다. 그러나 오히려 현실은 그 반대입니다. 미국 내 '테러를 파산시키기 위해 모인 9.11 유족'이 원고가 되어 법원에 제기한 100조 달러 규모의 소송을 보면 그 피고에 '사우디 아라비아 정부 관리들과 일부 은행'이 포함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셋째, 위의 편지가 '사우디 아라비아 국민' 명의로 되어 있는데 실제로 전 국민적인 동의의사가 있었을까 하는 점입니다. 그러나, 사우디 아라비아의 지식인들이 "미국의 내정간섭을 규탄하고 내부 국민단합을 촉구하는 서명 운동에 돌입"했으며 성명에서 "미국 정부가 자행하는 힘의 정책, 오만함과 이중적 잣대에 의한 정책"을 비판한 것을 보면 반드시 그런 것 같지는 않습니다.

공교롭게도 위의 편지가 미국 신문을 통해 전면광고로 모습을 드러낸 바로 그날 같은 신문의 1면에서는 머릿기사로 "미국이 유엔 결의 하에서 이라크를 공격할 경우 사우디 아라비아가 미군에게 자국내 기지 사용을 허가할 것"을 보도했습니다. 이 역시 사우드 알-파이잘 사우디 아라비아 외무장관이 발표한 것으로 <씨엔엔방송>과의 회견에서였습니다.

우연인지는 모르겠지만 위의 편지를 기점으로 사우디 아라비아는 대(對) 이라크 정책의 변화를 보이고 있습니다. 사우디 아라비아가 중동국가 가운데 가장 단호하게 미국의 이라크 군사공격을 반대함으로써 아랍권의 반전여론을 선도해왔다는 점에 비춰볼 때 적지 않은 변화인 것만은 확실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사우디 아라비아의 대(對) 이라크 정책에 변화를 가져왔을까 하는 의문이 남습니다. 그러나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대(對) 이라크 정책'의 변화라기보다는 '대(對) 미국 정책의 변화'가 아닐까 싶습니다. '사우디 아라비아 왕세자의 편지'로 대변되는 그들의 대(對) 미국 정책은 예전과는 사뭇 다른 양상을 띠고 있습니다.

▲ 사우디 아라비아 국기
그 변화의 단초를 예감할 수 있는 몇 가지 신문보도입니다.

첫째, 지난 8월 7일 미국 보수파 민간연구소인 랜드연구소는 "사우디아라비아를 악의 핵심이자 중동지역 내 미국의 가장 위험한 적"으로 간주한 보고서를 국방정책위원회에 브리핑했다가 큰 논란을 일으킨 적이 있습니다. 이 보고서는 "사우디가 미국의 적을 지원하고 우방을 공격하고 있다"면서 "테러에 대한 지원을 멈추지 않으면 유전이나 미국 내 자산을 압류할 것이라고 최후통첩을 발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둘째, 그 보고서에 대한 여파인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사우디 아라비아의 부유층들이 최근 "미국에서 1천억-2천억달러의 투자자금을 철수시켰다"는 보도가 지난 8월 20일 있었습니다. 사우디 아라비아의 미국 내 전체 투자액은 4천억-6천억달러로 추산되는데 그 자금이 대거 빠져나갈 경우 미국의 경제회복 노력이 심각한 타격을 입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 적도 있습니다.

셋째, "미국과 사우디 아라비아의 수출관계가 12년만에 최저 수준을 기록했다"는 보도가 지난 8월 23일 있었습니다. "올 상반기 미국의 대(對) 사우디 수출액은 지난해 같은 기간에 견줘 30%나 급락해 12년만에 최저치"를 기록했으며, 사우디의 대(對) 미 수출도 같은 기간 동안 24%나 떨어진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종합해서 볼 때, 사우디 아라비아가 미국의 대 이라크 공격위협을 공개적으로 반대하고 기지 제공을 거부하면서 양국관계에 균열이 시작되었고 그러한 정치적 불화에서 경제적 다툼으로 발전한 두 나라의 관계는 악화일로에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사우디 아라비아 왕세자의 편지'와 더불어 사우디 아라비아의 대미외교 자세가 변화된 것은 아무래도 갑작스럽다고 보여집니다.

물론 지난 12일 부시 대통령이 유엔 총회연설에서 유엔에 위기 해결의 1차적 역할을 부여하겠다고 밝힌 것도 한 이유가 되겠지만, 더 큰 이유는 아무래도 사우디 아라비아 친미정권의 한계가 아닐까 싶습니다. "9.11 테러 이후 미국과의 관계가 악화하면서 위기감을 느낀 일부 사우디 아라비아 왕자들이 대미 강경책에 우려를 나타내고 있다"는 소문이 외교가에 나돌고 있다는 보도가 그러한 주장한 입증해 주고 있습니다.

지난 16일 이라크가 유엔 무기사찰단의 복귀를 무조건 받아들이겠다고 밝힘에 따라 이라크 사태를 둘러싼 국제사회의 논의가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었습니다. 그러나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자국의 이익을 둘러싼 국제 역학관계는 너무도 복잡해서 한 가지 사실로는 전체 큰 그림을 보기가 어렵게 느껴집니다.

때때로 이러한 국제관계는 일종의 '퍼즐게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이제 겨우 작은 몇 조각을 추스렸는데 그 이외에도 위아래 옆으로 무수한 조각들이 널려 있는 것 같은. 이 복잡미묘한 국제역학구도에서 한국의 퍼즐 조각은 어떤 모습일까 하는 의문도 듭니다.

지난 16일, 국방부는 미국이 이라크에 대해 군사공격에 나설 경우 군사지원 여부와 구체적 지원방안 등을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비록 군사동맹 관계라고는 하지만 미국의 요청이 있기도 전부터 이라크 공격을 지원문제를 공식적으로 발표했는지 답답한 마음이 듭니다.

국방부의 발표를 들으며 '사우디 아라비아 왕세자의 편지'가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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