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이탈리아전 연장전에서 한국 안정환이 역전 골든골을 터뜨리자 히딩크 감독 등 코치진이 환호하고 있다. ⓒ 연합뉴스

"차두리를 투입하면서 홍명보를 빼다니?"

이 장면에서 많은 축구팬들은 일순간 의아해 했을 것이다. 그보다 먼저 김태영을 빼면서 황선홍을 넣을 때까지만 해도 그럴 수 있으려니 했다. 몇 분이 흘러갔고, 필자는 히딩크의 지혜에 무릎을 칠 수밖에 없었다. 히딩크의 지혜로운 선수 교체가 흥분하고 있던 트라파토니를 꺾는 순간이었다. 설기현의 극적인 동점골이 터지기 전부터 이탈리아 수비수들은 한국 공격수 누구를 먼저 마크해야 할지 모를 정도였으니까.

'설기현-황선홍-안정환-차두리-이천수'

일순간 한국의 공격진은 다섯 명으로 불어났고 말디니를 중심으로 한 이탈리아 수비수들은 우리 선수들을 놓칠 수밖에 없었다. 잉글랜드가 10명의 필드 플레이어를 극단적으로 수비라인에 세워놓았던 것 이상으로 충격적인 요법이었다.

거기에는 히딩크의 지혜로움만큼이나 소중한 '믿음'이 있었다. 결승 골든골을 성공시킨 '히어로 안정환'은 적어도 전반전 결과로 볼 때, 감독의 입장에서 미련을 버릴 수도 있었다. 페널티킥을 성공시키지 못했고 두 번의 결정적인 골 찬스를 놓친 선수였다. 부폰이 날렵하게 낚아챈 페널티킥 상황은 그렇다쳐도 골문 앞 7미터 정도 위치에서 왼쪽 너머로 날린 슈팅과 페널티 에어리어 밖 정면에서 날린 23미터짜리 중거리슈팅은 골잡이로서 매우 아쉬운 순간이었다. 그러나 히딩크의 큰 믿음은 안정환을 포함한 많은 선수들에게 더 큰 용기를 주었다.

설기현의 측면 플레이도 그렇게 만족스럽지 못했다. 특유의 왼발 감아올리기가 빛을 발하지 못한 경기였다. 히딩크는 그래도 설기현을 포기하지 않았고 보은(報恩)의 동점골을 성공시켰다.

코코에게 전후반 내내 막혔던 박지성을 선수 교체(이천수 <-> 김남일)와 함께 중앙 미드필더로 돌렸다. 박지성의 멀티플레이 능력도 뛰어났지만 감독의 지혜와 믿음이 더 크게 어우러진 상황이었다. 처음부터 연장전까지 계속해서 뛴 선수인가를 의심할 정도로 박지성은 미드필드를 누볐다. 상대 공격을 얄미울 정도로 차단했고 공격의 물꼬를 시원스레 터 주었다. 히딩크 감독의 철저한 '믿음' 없이는 상상하기 힘든 결과였다.

최진철을 비롯한 수비수들의 눈부신 선방은 안정환의 골든골에 견줄 만큼 칭찬할 만하다. 천하의 말디니가 안정환의 결정적인 헤딩슛을 마크하지 못하고 주저앉았듯이, 이름난 수비수라도 축구 경기에서 서너차례 정도는 상대 공격수를 놓칠 수 있는 것이다. 특히, 최진철은 비에리의 선취골 상황에서 아차하는 순간에 어깨 싸움에서 밀렸지만 이후 비에리의 고공 공격에 한 발 먼저 차단하는 수비 능력을 보여주었다.

이운재의 선방은 그 이상으로 빛났다. 비에리에게 첫 골을 내주고 전반 38분 페널티 에어리어 앞에서 우리 선수들이 느슨한 플레이를 하며 넘겨준 볼은 이탈리아의 토띠에게로 갔다. 토띠가 홍명보의 오른발 옆으로 예리하게 찔러준 볼은 2선에서 빠르게 침투하던 토마시에게 연결되었고 추가 실점의 상황이라 여겨졌지만 이운재가 왼쪽으로 몸을 날리며 막아냈다. 또한 연장 후반 설기현의 힐 패스가 잘못되어 가투소에게 1:1 찬스를 내주었을 때, 결정적으로 손을 뻗쳐 막아낸 상황은 모든 국민의 가슴을 쓸어내리게 하기에 충분했다. 설기현은 멋진 동점골을 성공시키고도 아쉬운 패배의 원인 소리를 들을 뻔했다. 이운재는 흔들리지 않았고 자신을 믿고 계속 기용해준 감독에게 더 큰 믿음을 주었다.

연장 후반이 흘러가고 있을 때, ITALIA라는 글씨가 굵게 새겨진 트레이닝복을 입은 한 이탈리아의 후보 선수가 트라파토니 감독 옆에 서서 뭐라고 큰 소리로 이야기하는 장면이 화면에 잠깐 잡혔다. 무슨 내용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필자 생각에 "왜 자신을 기용하지 않(았)느냐?"는 하소연이 아니었을까?

경기 중 선수와 선수 사이의 믿음은 훌륭하고 세련된 패스로 나타난다. 선수와 감독 사이의 믿음은 경기 결과를 넘어 '무한한 에너지'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 에너지를 스페인도 느꼈을 것이다.

자랑스런 우리 젊은이들을 믿자. 그가 우리에게 믿음을 준 만큼 네덜란드人 '히딩크'를 믿자.
2002-06-19 00:12 ⓒ 2007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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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대인고등학교에서 교사로 일합니다. 축구 이야기, 교육 현장의 이야기를 여러분과 나누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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