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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엔 그저, 풋고추 한 가지면 밥 한그릇거리가 된다. 물론 멀쩡한 국그릇에서 고춧가루 몇 개만 씹혀도 얼굴이 벌개지는 내 주제엔 찬물과 수건도 준비해야 하고, 풋고추도 이왕이면 덜 매운 것으로 골라야 한다.

그러나 그런 수선을 떨고라도 풋고추를 집어드는 이유는 여름 낮의 열기마저 청량하게 느끼게 만들고야 마는, 그 말도 못하게 자극적인 상큼한 풋내 때문이다. 그래서 그렇게 전쟁이라도 치르듯이 숨 몰아쉬어가며 밥 한그릇을 비우고 찬물에 땀을 씻은 오후, 반짝하는 더위도 그리 야속하지 않다.

나에게 외국인 친구가 하나 있다. 내가 다니던 학교의 한국학 연수프로그램에 참석했을 때 만난 '보이코'라는 불가리아인인데, 한국어를 전공한 그는 연수가 끝난 뒤에도 불가리아어로 번역할 한국 문학작품을 찾으러 몇 번인가 한국을 찾았었다.

보이코는 한국 소주를 좋아했고, 나는 그가 직접 만들어주는 불가리아식 요구르트를 좋아했다. 그래서 우리는 시간 날 때마다 요구르트를 안주삼아 소주를 마셨고, 취하면 내가 가르쳐준 박인수의 노래 '봄비'를 합창했다.

한번은 보이코가 고향집 사진을 보여준 적이 있었다. 우리 한우와 꼭 닮은 누렁소 등에 얼기설기 둘린 나무 보습. 게다가 애초에는 금발이었겠지만 지금은 하얗게 새어버린 머리칼에 굵게 주름진 자그마한 얼굴, 가죽 허리띠도 아닌 넥타이 비슷한 헝겊으로 동여맨 어설픈 양복바지, 그리고 그 위로 삐져나온 때묻은 와이셔츠. 보이코의 할아버지는 내 할아버지와 크게 다르지 않아보였다. 그의 고향집은 놀랍게도 우리 농촌과 꼭 닮아있었다.

내가 그 모습이 한국의 것과 꼭 닮았다고 하자, 그는 한국의 농촌도 한 번 보고싶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그 여름, 충북 음성의 내 고향집으로 초대했다.

서울에서는 조금 덜하지만, 시골집으로 가는 버스에서부터 이미 금발의 외국인과 동행하는 나는 구경거리였다. 더구나 고향집 들어서는 길에서부터는, 만나는 모든 사람들의 고개가 우리 쪽으로 기울었다. 외국인을 보는 것만으로도 구경거리건만, 더구나 아주 유창하지는 못해도 한국말로 대화를 해가며 처음 만나는 이웃들에게 인사까지 꾸벅꾸벅 해대는 서양사람은, 마치 두발로 서서 걸어다니는 강아지만큼이나 신기하게 보였던 것이다.

"느티나무 옆집 김씨 할아버지네 손자가 미국사람을 데려왔다드만"
"미국사람? 그 손자가 서울서 공부를 많이 했다더니 미국사람도 사귀는 모양이지?"
"그 미국사람이, 한국말도 잘하는개벼. 내가 지나가는데 '안녕하세유'하고 인사도 꾸벅 하데."

시골 마을에서는 아직도 서양사람이라면 모두 미국인으로 통한다. 그렇게 서울로 올라오기까지 한 사흘간 고향마을 최대의 뉴스메이커는 단연 보이코와 나였다.

그런 어려운 손님을 맞은 우리 가족 입장에서는 제일 신경쓰이는 것이 음식이었다. 그냥 미국인이나 일본인이라면 고기나 생선으로 어떻게 해보겠는데, 영 생소한 불가리아 사람이라니. 어머니는 도대체 어떤 종류의 음식을 좋아할지 감이 잡히지 않으셨나보다.

"얘, 저 사람은 뭘 잘 먹니?"
"보이코요? 요구르트랑 소주요."
"아니, 그런 거 말구, 끼니를 뭘로 하느냐구."
"글쎄, 학교에서는 그냥 밥 같이 먹었는데."

나도 그가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 지는 잘 몰랐다. 가끔 그가 기숙사 밖 상점으로 나가서 사오는 물건들은 항상 요구르트를 만드는데 필요한 우유, 그리고 소주뿐이었다. 그래서 일단 한 끼 먹여보고 가늠하자고, 먹던 대로 점심밥상을 차렸다. 그래도 서양사람인지라 육류가 좋겠다 싶어 양념없이 구운 쇠고기 한접시가 있기는 했다.

그런데 보이코가 제일 먼저 손을 가져간 반찬은 엉뚱하게도 할아버지 드시라고 올려놓은 풋고추였다.

"아이구, 그거 매운 건데. 고추 알아요? 그거 매워요."
보나마나 뭔지도 모르고 집어먹고는 난리나겠다 싶어 어머니가 두손을 훼훼 저었다.
"보이코. 이거 피망하고는 좀 다른데. 이건 많이 매워요."
나도 놀라서 나섰지만, 보이코는 태연했다.
"예, 고추. 좋아해요. 제 고향에서도 고추를 길러요."
게다가 그는 한 술 더 떴다.
"고추는 빨간 게 더 맛있는데…."

어머니는 급히 밭에서 빨갛게 익은 고추 여남은 개를 따오셨고, 보이코는 소금을 꼭꼭 찍어가며 매운내가 옆의 내 코에까지 푹푹 끼치는 그 빨간 고추를 맛있게 먹어치웠다. 고추장 대신 소금을 찍어먹는 빨간 고추는 달콤하고 담백해서 더 맛있다고 했다. 그래서 그가 생고추 한접시를 다 씹어삼키는 동안 나는, 남으면 버려야 하는 쇠고기나 먹어치워야 했다.

"은식, 한국 고추는 굉장히 커요. 우리 불가리아 고추는 아주 작아요."
"그래요? 한국에도 '꽈리고추'라고 부르는 작은 고추가 있긴 한데, 그건 더 매워요. 그래서 그건 간장에 조려서 먹거나 하거든요. 그래서 그런지 한국에는 '작은 고추가 맵다'는 속담이 있어요."
"맞아요. 불가리아 고추는 한국 것보다 더 작고 더 매워요."

모름지기 '매운 맛' 하면 한국이라고 단단히 자신했던 내 생각과 달리, '작아서 매운' 불가리아 고추에 단련된 보이코에게 손가락보다도 훨씬 길 정도로 큰 한국 고추는 오히려 싱겁기만 했던 것이다.

시골집을 떠나기 전, 보이코는 부탁이 있다고 했다.
"한국 고추는 크고 맛있어요. 씨를 불가리아로 가져가서 심고 싶어요."
어머니는 고추씨 한 봉지와 빨갛고 파란 고추 한 봉지를 챙겨주었다.

그 해 가을 불가리아로 돌아가기 전날, 보이코는 소주를 같이 마시고 싶다며 초대했다. 그가 준비한 안주는 언제나와 같이 요구르트, 그리고 시들시들 말라가는 풋고추 몇 개와 소금이었다. 나는 역시 싱싱한 놈을 고추장에 찍어 먹어야 맛이지, 그렇게 북어살이라도 씹듯이 먹는 마른 고추는 생소했다. 그래도 보이코는 맛있게, 아껴가며 먹느라 그 날까지 남아있던 마지막 풋고추를 비웠다. 그리고 내가 항상 좋아하던 요구르트를 만들 수 있는 유산균 한 종지를 선물로 물려주었다.

그 고추씨를 불가리아로 무사히 가지고 갈 수 있었는지, 그리고 무사히 싹을 띄워 불가리아의 흙 속에서도 한국에서만큼 큼직한 살을 키워냈는지, 아직 물어보지 못했다.

그날 보이코는 이런 말을 했었다.
"은식은, 다른 한국사람들과 달리 약속을 잘 지켜서 좋아요."
순간, 나는 '코리아 타임'이라는 말을 떠올렸다. '이 사람이 접한 한국사람들이 시간약속을 많이 어겼었구나. 부끄러운 일이다'
"아니예요. 보이코씨가 만난 사람들이 특히 시간 약속을 잘 안지키는 사람들이라 그랬을 거예요. 보통 한국사람들은 약속을 잘 지켜요. 그리고 저도 시간 약속 늦은 적이 몇 번 있었는데요 뭘."

그렇게 나는 '한국사람들'을 변호하는 한편, 나는 '그래도 나은 한국사람'이라는 점을 은근히 받아들이고 있었다. 물론, 보이코가 생각한 것은 엉뚱한 것이었다.

"은식은, 가끔 약속시간에 늦기는 해도 한 번 한 말은 지켜요. 다른 사람들은 '언제 술 한 잔 하자'고 해놓고 술 마시러 안 와요.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내 고향집을 보여줄게요' 해놓고도 안보여주거든요. 은식은 약속을 잘 지켜서 좋아요."

고작 요구르트 한 잔 얻어먹을 욕심에, 그리고 술친구 만나는 즐거움에 찾아든 공로로 나는 그에게 '괜찮은 한국인'으로 남게 되었지만, 꼭 그에게 한 말이 아니더라도 이것 저것 별 생각없이 흘렸던 말과 약속들이 새삼 묵직하게 눌러오는 순간이었다. 그 뒤로 군에 다녀오느라 그와의 연락도 꽤 오래 끊어졌지만, '꼭 다시 만나자'는 약속이 기억에 걸려서라도 어떻게 다시 연락을 이어봐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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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 관한 여러가지 글을 쓰고 있다. 오마이뉴스에 연재했던 '맛있는 추억'을 책으로 엮은 <맛있는 추억>(자인)을 비롯해서 청소년용 전기인 <장기려, 우리 곁에 살다 간 성자>, 80,90년대 프로야구 스타들의 이야기 <야구의 추억>등의 책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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