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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반도 최강의 야구단, YMCA야구단!

▲ 영화 < YMCA야구단 >을 유심히 본 독자라면 배우 송강호가 월담해 들어간 집의 이름이 태화관이라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바로 1919년 3월 1일, 독립선언문이 낭독되었던 그 건물의 모태.
ⓒ 명필름
배우 송강호와 김혜수가 일제시대 당시 YMCA에서 만든 야구단의 대(大)타자와 코치로 나와 열연한 영화 < YMCA야구단 >이 얼마 전 개봉되면서 많은 관객들의 눈길을 끌었다. 장르는 코미디라지만 감동을 선사했던 < YMCA야구단 >은, 인물들의 연기나 시나리오 못지 않게 당시 모습을 재현하는 데에도 애를 쓴 흔적이 엿보인다.

특히 문화유산답사에 흥미를 갖고 있던 터에, 극중에서 배우 송강호가 짐짓 뭉근한 태도로 한번이라도 더 '뻬쓰볼'을 구경하러 월담을 해 들어간 집이 눈에 띄었다.

영화를 꼼꼼히 본 사람이라면 기억하겠지만 그 집의 중심 건물쯤 되는 집에 걸려 있는 편액은 다름 아닌 '태화관(泰和館)'. 물론 한자로 쓰여 있어 한자 세대가 아닌 젊은이들은 그냥 지나친 이들이 대다수였겠지만, 태화관은 그저 '영화의 한 배경으로서의' 태화관에 그치지 않는다.

영화를 제작한 '명필름'에 따르면 그 건물 자체는 고려시대에 세워진 '전주 향교'로, 원래의 태화관과는 거리가 있다. 그러나 당시 YMCA 선교사들이 조선땅에 발을 들여놓으며 사용하기 시작한 건물이 바로 태화관이었고, 일제시대 당시 독립운동의 큰 맥을 잇는 3·1운동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생각하면 쉽게 지나칠 수 없는 건물이 바로 태화관이다.

"오늘은 조선의 독립을 선언하는 매우 영광스러운 날"

▲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 중 29인이 모여 독립선언문을 낭독한 태화관이다. 당시 안순환이 만든 궁중요리 전문점 명월관의 지점이었다.
ⓒ 권기봉
이미 1919년 2월 초부터 손병희와 오세창, 권동진 등이 나서서 독립 선언에 대한 의논을 하고 있었고, 송진우와 최인, 이후 친일의 길로 들어선 최남선 등이 그것을 어떻게 진행할지에 대한 검토작업을 하고 있었다. 특히 당시에는 종교계의 역할이 커 크리스트교 계열의 16명과 천도교 15명, 한용운 등의 불교계 2명 등 모두 33인의 민족대표를 구성하는 작업까지 끝마쳤다.

3·1운동은 이름 그대로 3월 1일에 시작되었으나 기실 알고 보면 당초 거사일은 같은 해 1월 22일 승하한 고종의 인산일(국장; 國葬)인 3월 3일이었다. 그러나 3일에는 고종의 국장이 있기에 당시 사회 분위기 상 불경스러울 수도 있으므로 2일로 하루 당기려 했으나 이 날은 또 크리스트교인들이 중요시하는 주일, 즉 일요일이었기에 부득불 3월 1일이 거사일로 정해지게 되었다.

아직 추위가 싹 가시지 않은 1919년 3월 1일 새벽. 탑골공원은 이른 아침부터 서울을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사람들로 붐비기 시작했다. 이미 2월 27일 밤 보성전문학교장 윤익선(尹益善)의 명의로 보성사(普成社)에서 인쇄해 제1호 <조선독립신문(朝鮮獨立新聞)>과 함께 배포된 약 2만1천 장의 독립선언문을 보고 또 듣고 해서 탑골공원을 찾아온 사람들이 바로 이 5천여 명의 사람들이었고, 거의 같은 시각 탑골공원 서쪽에 자리한 태화관에도 정오부터 민족대표들이 속속 도착하고 있었다.

거사 시간인 오후 2시가 가까워옴에 따라 33인의 민족대표 중 한 사람이었던 최린은 당시 태화관 주인이었던 안순환으로 하여금 조선총독부에 전화를 걸어 민족대표들이 여기서 독립선언식을 갖고 축배를 들고 있노라고 알리게 했다.

▲ 1919년 3월 1일 정오부터 태화관으로 모여들기 시작한 민족 대표 29명은 오후 2시가 막 넘어서면서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기 시작한다.
ⓒ 권기봉
드디어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손병희의 집에 모였던 민족대표 모두가 참석하진 않았지만(불참 : 길선주, 김병조, 유여대, 정춘수), 오후 2시를 막 넘어서는 순간 우여곡절 끝에 태화관에 모인 민족대표들은 손병희의 제의로 한용운이 독립운동의 결의를 다지는 의미에서 짧은 인사를 한 뒤 만세 삼창을 했다. 이후 15분만에 독립선언문이 낭독되었고, 이들은 곧장 미리 연락을 받고 달려온 일제 경찰에게 끌려갔다.

한편, 2시 30분 경 탑골공원에서는 이미 2시에 와서 독립선언문을 낭독했어야 할 민족대표들이 나타나지 않자, 경신학교 졸업생이었던 정재용(鄭在鎔)이 탑골공원 중앙에 있는 팔각정에 올라 독립선언문을 직접 낭독하고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는 등 군중들의 만세 소리와 태극기의 물결이 서울 하늘을 갈랐다.

삼일독립선언유적지
홀로 서서 역사를 증언하는 바위

"이 집터는 본래 중종때 순화공주의 궁터라 불행하게도 을사 경술 두 조약때 매국 대신들의 모의처로 사용되더니 삼일독립운동 때에는 그 조약을 무효화시킨다는 뜻으로 여기에서 독립선언식이 거행되었다. 즉 기미년 삼월일일 정오 탑골공원에서 터진 민족의 절규와 함께 민족대표 일동은 여기 명월관 지점 태화관에서 대한독립을 알리는 식을 거행하는 동시에 미리 서명해 두었던 선언서를 요로에 발표하고 급히 달려온 일경들 앞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제창하고 일제히 사로잡혔다. 그 뒤 남감리 교회는 이 터를 매수하여 태화기독교사회관 건물을 지었으며 일제 말기에는 침략의 도구로 징발되었으나 해방과 더불어 이를 되찾아 사업을 계속했다. 그러나 도시재개발계획에 따라 건물이 헐리게 되매 새집을 짓고 여기에 그 사연을 줄잡아 둔다."

건립일 1997년 3월 1일
당초 건립 1982년 8월 15일

오리 전택부 글
해청 손경식 글씨
특히 이날 시위를 비롯한 독립만세운동에 있어 학생들의 공이 적지 않았다. 탑골공원을 그득하게 메운 사람들 대부분이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는 학생들이었다. 특히 이들은 오전 수업을 마친 후 학교 단위로 자리를 채웠을 뿐만 아니라, 경성의전(京城醫專) 학생들은 아예 결석을 하고 이날 탑골공원을 찾은 것이었다.

이들은 운동을 이끄는 지도자들이라 할 민족대표들이 일제에 의해 끌려간 후 당시 유일하게 조직력을 갖춘 세력이었으며, 이후 약 한 달 간 실천력 있는 행동으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연이어 집회가 계속되는 가운데 3월 5일에는 (지금의 서울역과 염천교 중간 지점에 있었던) 남대문역과 남대문 사이에서 독립연설회(獨立演說會)가 개최되었고, 지방에서 올라온 많은 학생들이 가세하는 등 그 세력을 날로 커져만 갔다. 특히 이날부터의 시위에는 종래 학생 참가자들의 대다수를 이루던 중등학교 이상의 학생들뿐만 아니라 보통학교 학생들까지 가세하면서 독립만세운동의 열기는 점차 격렬해져 갔다.

이후 다소 잠잠해지는가 싶더니만 3월 22일 오전 9시에 서울 봉래동 지역에서 수백 명의 노동자를 시작으로 다시금 독립만세운동이 점화되었고, 이날 밤 11시쯤에는 (현재도 극장으로 이용되고 있는) 종로 단성사(團成社)에서 활동사진을 보고 있던 관객들이 일제히 일어나 독립만세를 외치기도 했다.

다음날인 23일에도 이런 열기는 사그라지지 않고 서울 정동 등지의 보통학교에서 진행 중이던 졸업식 도중 전학생이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런 열기는 일제의 강력한 탄압에 의해 운동이 사그라지는 4월초까지 근 한달 동안 조선 반도를 달구어 갔다.

매국노 이완용의 집에서 독립선언을 하다?

▲ 2·8독립선언서. 3·1운동이 일어나기 전부터 일본 유학생들은 대한제국의 독립을 위해 식민 모국이던 일본에서도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독립만세운동을 시작했다.
ⓒ 권기봉
이와 같은 3·1운동의 시작을 알리는 독립선언문이 낭독된 태화관은, 쉽게 말해 기생이 나오는 일종의 식당이었다. 즉 일개 음식점에서 한 나라의 비통과 희망을 동시에 담은 독립선언문이 낭독된 것이었다. 그런데 이것은 다음 사실을 알면 그리 놀랄 만한 일은 아니다. 태화관이 한때 매국노 이완용이 살던 집이었다는 사실 말이다.

이야기가 조금 길어지겠지만 한번 찬찬히 들여다보자. 태화관이 있던 터는 일제시대 이전에도 정치사와 아무런 연관이 없었던 것은 아닌 듯하다. 즉 태화관이 있던 터에는 조선시대 중종 반정의 공신이자 세종의 8번째 아들인 영응대군 염의 사위인 정국공신 구수영이 살기도 했고, 안동 김씨 집안이 오랫동안 소유하고 있었을 때도 있었고, 한때는 헌종의 후궁인 경빈 김씨의 사당인 순화궁으로 쓰이는 등 많은 세도가들이 이 집을 드나든 역사가 있었다.

터의 운명이 그리 순탄치만은 않은 것인지 1908년 순화궁이 다른 곳으로 이전해가면서 빈집으로 남게 된 것을 바로 매국노 이완용이 사들여 별장을 조성하기에 이르렀고, 을사·경술 두 조약 때 친일파들이 모여 정국을 논하기도 하는 등 그들의 교우처로 쓰이기도 했다.

그런데 한일합방이 있은 후 어느 날, 이 별장 마당에 있던 커다란 고목나무에 벼락이 떨어지는 사건이 일어났다. 주변 사람들은 이완용 별장에서 일어난 이 희한한 일을 두고 '하늘이 무심하지 않아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에게 하늘에서 내리는 천벌'이라며 수군거렸다. 기분이 찜찜해서였는지 그 이유야 명확히 알 수 없지만 이완용 역시 이 낙뢰 사건이 있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별장을 팔려고 내놓았다.

▲ 한때 매국노 이완용이 살았고, 독립선언문이 낭독되기도 한 태화관이 있었던 곳에 들어선 태화 빌딩. 2002년 10월 서울 하늘 아래 지나간 역사를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 권기봉
잠깐 이야기를 돌려, 대한제국 황실에서 궁중요리를 담당하던 안순환이라는 이는 나라의 앞날이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을 만큼 혼탁해지고 대한제국의 위상마저 끝간 데 없이 추락하자, 궁에서 나와 1909년 현 서울 세종로의 동아일보 사옥이 위치하고 있는 자리에 회색빛 2층 양옥을 올리고 '명월관'이라는, 소위 '궁중요리 전문점'을 내게 된다.

당시 관기 제도가 폐지되면서 궁중기생들이 그를 따라 명월관으로 모이게 되어 '지체 높으신' 의친왕 이강(李堈)공이나 박영효 등이 출입했고 이완용이나 송병준 등 친일파들도 단골로 불릴 정도로 자주 찾았다고 전해진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이완용의 별장에 벼락이 떨어져 그가 그 집을 내놓게 되었을 때 때마침 명월관에도 화재가 나자, 안순환은 이완용의 별장을 사서 1918년 명월관 분점을 만들게 되었는데, 이름을 태화관(太華館; 이후 소리가 같은 泰和館으로 이름이 바뀜)이라고 했다.

'희망찬 21세기'에 들어선 지금, '슬픈 역사'는 그리 중요치 않은 것일까

▲ 3·1운동의 열기는 근 한 달 간 계속되었는데, 당시 고종이 승하하기 전 머물던 경운궁에서는 대규모 집회가 자주 열렸다.
ⓒ 권기봉
그러나 비장한 분위기 속에 독립선언문이 낭독되었던 '태화관'은 현재 서울 하늘 아래 그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다. 그도 그럴 것이 3·1운동이 일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일제에 의해 태화관은 다른 곳으로 이전하게 되었고, 남감리 교회가 그 터를 매수해 '태화 기독교회관' 건물을 지었기 때문이다.

이후 일제 말기에 이르러 침략의 도구로 징발되기도 하는 등 풍파를 겪다가 도시 재개발계획에 따라 이전 건물을 헐고 지금의 태화 빌딩이 들어서게 되었다.

한때는 세도가들이 드나들던 집이었지만 시대를 거치며 매국노 이완용이 을사조약 등을 모의하기도 했던 곳, 또 그와 같은 민족적 치욕을 조금이나마 씻어보기 위함인지 매국노들이 '매국'을 획책하던 그곳에서 민족대표들이 모여 독립선언문을 낭독한 곳, 그곳이 바로 태화관이다.

▲ 독립만세운동에 동참하고자 서울 시내 대부분의 상가들도 공동 철시를 결의했다. 일제 군경(軍警)이 아무리 협박을 해도 상인들은 듣는 둥 마는 둥 독립만세운동의 열기에 빠져들었다.
ⓒ 권기봉
'희망찬 21세기'에 들어선 지금, '슬픈 역사'는 그리 중요치 않다는 듯 태화관이 있던 현(現) 태화 빌딩 아래에는 그저 '삼일독립선언유적지'라고 쓰여진 바윗돌 하나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을 뿐이다. 주의하지 않으면 그냥 지나치기 쉬운 골목 구석에… 어쩌면 인사동 194번지의 그 바위는 그 어두운 빌딩 사이의 골목에서 슬픈 역사에 대해, 그 역사에 무심하기만 한 우리들에게 말없는 항변을 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태화관이 있던 자리, '태화빌딩' 찾아가는 길

먼저 지하철을 이용할 경우 1호선 종각역이나 1·3호선이 모두 지나는 종로 3가역에서 내린다. 종각역에서 내리는 것이 태화 빌딩까지 가기에 조금 가깝기는 하지만, 어느 역에서 내려도 태화 빌딩까지 가는 데 그리 오래 걸리진 않는다. 어느 역에서 내리든 두 역 사이에 위치한 탑골공원까지 걷자. 1919년에는 더 복작거렸을 종로, 언제나 시끌벅적한 종로가 이때처럼 유쾌하게 다가올 때가 없다.

탑골공원의 정문인 삼일문을 보고 서서 왼쪽을 보면 횡단보도 건너 '금강제화' 간판이 한 눈에 들어온다. 일단 그리고 건너가자. 그 다음 종로를 따라 직진하지 말고, 오른쪽으로 조금만 가면 왼쪽으로 소위 '인사동 골목'으로 빠지는 길이 나온다.

이 길을 따라 곧장 걷자. 태화 빌딩이 목표라고 해서 앞만 보고 무작정 걸을 것이 아니라 주변을 둘러보는 여유도 한번 발휘해 보자. 요즈음 들어 지나치게 상업화된 상점들이 다소 눈에 거슬리긴 하지만 그래도 이것저것 먹거리도 다양하고 상점 이름도 예쁜 것들이 많으니 그나마 다행인 듯 싶다.

대일 빌딩을 지나 '갤러리 상'과 '오! 자네 왔는가', '구하산방(九霞山房)'을 지나면 이내 제법 넓은 사거리인 '인사사거리'가 나오는데, 여기서 왼쪽 길로 돌아서자. 그러면 이내 골목이 넓어지면서 왼쪽으로는 하나로 빌딩이, 오른쪽으로는 '일 마레'와 'Seattle's Best Coffee'가 나온다. 태화 빌딩은 하나로 빌딩 바로 다음 빌딩으로, 관훈동 '맥 도날드' 맞은편에 있다. 특히 건물 오른쪽 골목 입구쯤에 '삼일독립선언유적지' 비가 있느니 유심히 살펴볼 일이다.

길을 잘 모르겠거든 인사동 입구에서부터 주로 주차장 관리인 아저씨나 상점 주인들에게 '인사사거리'나 '태화 빌딩', '하나로 빌딩'을 물어 가는 것이 상책이리라. / 권기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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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 기억 저편에 존재하는 근현대 문화유산을 찾아 발걸음을 떼고 있습니다. 저서로 <서울을 거닐며 사라져가는 역사를 만나다>(알마, 2008), <다시, 서울을 걷다>(알마, 2012), <권기봉의 도시산책>(알마, 2015)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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