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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7시 15분이 되면 다시 업소로 끌려가요. 제발 저 좀 꺼내 주세요."

지난 10월 28일 새벽 6시 40분경, 군산경찰서 여성상담실로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 직원이 전화를 받자 다급한 목소리의 한 여성이 자기를 '업소에서 일하는 여자'라고 소개했다.

그 여성이 일하는 곳은 지난해 9월, 매춘업소 화재 사건으로 5명의 젊은 여성을 죽음으로 몰고 갔던 군산시 대명동 이른바 '쉬파리 골목'에서 불과 500여 미터 떨어진 곳이었다. 상담실 직원들은 전화를 끊자마자 그 여성이 '영업' 나와 있는 ○○여관으로 향했다.

"그 때, 얼마나 떨렸는지 몰라요. 경찰이 곧 올 것 같으니까 손님은 도망가 버려서 저 혼자 기다리고 있었어요. 창문 밖에 보니까 119까지 와 있고 자가용들이 죽 늘어서 있는데, 어휴, 빨리 빼내줬으면 좋겠더라고요. 하여튼 진짜 떨렸어요."

전화를 건 주인공은 올해 22살의 석희애(가명) 씨였다. '손님'과 여관으로 영업을 나갔다가 며칠 전부터 마음에 품고 있던 것처럼 어쩌면 이제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면서 손님에게 사정 얘기를 했다. 그리곤 그가 내준 핸드폰으로 외워 두었던 전화번호를 눌렀다.

"그 손님은 나랑 동갑인데 단골이에요. 전부터 내 몸에 멍든 거 자주 봤거든요. 저 보고 불쌍하다고 그러더라고요. 걔는 나한테 전화기 빌려주자마자 토꼈어요. 기소 맞았는데 잡히면 안 되니까. 어쩌면 삼촌한테 붙잡혀서 죽도록 맞았을지도 모르겠네요... 그래도 전화 안 할래요. 내가 어떻게 도망 나왔는데."

희애 씨는 자신에게 핸드폰을 빌려준 남자가 업소 '삼촌'들에게 붙잡혔으면 어쩌냐고 염려스러운 얼굴을 했다가는 금세 날선 눈빛을 해 보이며 도리질을 쳤다.

군산경찰서 여성상담실은 2001년 10월 하순경부터 관내 유흥업소 여성들을 대상으로 윤락행위등방지법에 대한 법률 설명 사례집을 배포하며 면담을 진행해 왔다.

경찰들은 면담을 나올 때마다 업주와의 관계에서 생긴 채무관계는 무효이니 거기에 묶여 살지 말고 신고하라는 말을 해주곤 했다. 사례집을 읽어보아도 그런 내용이 써 있었다.

희애 씨와 같은 처지의 여성들 역시 그런 내용을 모르지 않았다. 경찰이 직접 그런 내용을 알려주고 다닌다는 것이 신기하게 여겨지기는 했지만 실제로 그렇게 지켜지리라는 믿음은 전혀 갖지 못했다. 하지만 희애 씨는 망설이던 끝에 '업소'를 탈출하기로 결심을 하고 도움을 요청한 것이었다.

군산경찰서 여성상담실은 희애 씨의 제보를 토대로 그가 일하던 업소에서 여성들에게 매춘을 강요하고 금품 갈취, 감금, 폭행 등의 사실을 조사하여 업주 김아무개 씨를 지난 10월 28일 긴급체포 이후 곧바로 구속하였다.

하지만 문제는 간단치가 않았다. 구속된 김 씨는 그 지역 업주들 사이에서도 가장 장악력이 강한 사람이었다. 경찰들 사이에서도 김 씨는 '거물'로 통하고 있을 정도였다. 경찰들의 도움을 얻은 희애 씨는 업소를 벗어나기는 했지만 자신은 물론 가족들이 보복당할 것이 두려워 가족에게조차 알리지 못한 채 숨어 지내고 있다.

또한 희애 씨의 탈출을 지원한 여성상담실로는 군산 지역에서 영향력 있는 사람들로부터 우려의 소리가 자주 날아들었다. 상황이 이러하다보니 경찰조차도 희애 씨와 희애 씨 가족의 안전을 염려하며 불안해했다.

그 지역에서 관련 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한 경찰은 "지속적인 면담활동을 통해 도움을 요청하는 여성들이 많이 있다. 여성들이 뻔히 당하고 사는 게 보이는 데 어떻게 그 도움을 외면할 수 있나. 그들이 원한다면 한 명이라도 더 빼내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업주들의 협박과 어떤 형태이든 행해질지 모를 해악에 대한 염려, 그리고 과중한 업무 때문에 힘이 드는 게 솔직한 심정이다.

여성상담실은 그 동안 여러 차례 여성들의 탈출을 지원했다. 일부이기는 하지만 경찰이 자신들보다는 업주 쪽과 더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행태를 가까운 곳에서 보고 듣는 여성들이 제 스스로 경찰에게 도움을 요청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게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지난 해 9월, 군산화재사건 이후 꾸준히 면담 업무를 펴고 있는 그 지역 여성상담실의 활동이 여성들 사이에서 천천히 신뢰를 보여주었기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다들 '그래봤자 경찰이지'라며 의례적으로 면담에 임하던 여성들이 실제로 자기 동료들이 업소를 벗어나고 업주가 구속되는 것을 보며 조금씩 인식이 바뀌어 갔다.

무엇보다도 매춘여성들이 겪는 피해상황에 초점을 맞추고 철저한 증거자료를 수집하여 사건을 결말짓는 자세는 성매매 근절 활동을 하는 여성단체들 사이에서도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하지만 그렇게 쉽지 않은 과정을 거쳐 여성이 탈출에 성공한다 하더라도 어느 날 자취를 감추는 경우가 종종 있다. 업주들이 여성에게 매겨져 있는 몸값을 포기하지 않는 까닭이다. 또한 오랫동안 성매매 지역에서 일한 여성이 새로운 삶을 살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린다. 당장 신변의 위협으로부터 안전할 수 있는 쉼터조차 변변치 않으며 새로운 삶을 준비하도록 지원하는 체계 역시 부족하다.

경찰의 도움으로 성매매 지역을 벗어난 희애 씨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탈출을 누구보다도 반겨줄 친언니를 하루빨리 만나보고 싶지만 아직 마음을 놓을 수가 없다. 대가가 따를지 모르는데도 선뜻 핸드폰을 빌려주었던 '손님'에게 전화를 걸어 고맙다는 말 한 마디 건네고 싶지만 그마저도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

하지만 희애 씨는 불안한 마음을 무릅쓰고 모처럼 서점에 나가 운전면허시험 문제지를 한 권 샀다.

"전, 제일 먼저 운전면허증을 딸 거예요."

기억하고 싶지 않은 군산 '업소'시절, '영업방' 너머로 아침이 밝아 오는 걸 지켜보며 종종 이런 상상을 떠올리곤 했다. 자기 손으로 운전대를 잡고 차창으로 휙휙 불어오는 아침공기 가르며 가고 싶은 곳 어디로든 가는 그런 상상. 머지 않아 희애 씨가 제 삶의 운전대를 잡고 패기롭게 다시 젊음을 준비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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