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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또(!) 이사를 했다. 올 2월 베이징에 온 후 벌써 두 번째 이사인 셈이다. 지난해 톈진에서 살 때 이사 다닌 횟수까지 합치면 나는 중국에 있는 동포들 중에서도 가히 '이사의 여왕'이라 불리고도 남음직한 '이사쟁이' 직함을 달아 마땅하다.

왜 그렇게 이사를 자주 다니느냐고 묻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이사 다니는 '나'라고 이사가 좋아서 이사를 몇 달에 한 번 다니는 건 아니니까. 한마디로 다 '운'이 없어서 그렇다.

이사를 자주 다녀서 이제 이사라면 '도'가 트였을 법도 한데 나는 매번 이사할 때마다 항상 처음 이사하는 것처럼 어설프다. 이사짐도 당일 아침이 되어서야 서둘러 싸고 그나마 짐을 담을 상자를 구하지 못해 큰 여행가방 등에 몇 차례 싣고 오고가기를 반복하곤 한다. 이건 순전히 다 내가 게으른 탓이다.

올 여름 이후 베이징의 부동산값이 일제히 올라서인지 지금의 '집'을 구하는데 근 한 달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이사할 동네를 두군데쯤 '찍어놓고' 담벼락이나 음식점 등에 붙은 셋방 내놓는다는 쪽지를 싸그리 훑고 다녔는데도 좀처럼 쉽게 집이 구해지지 않았다. 살고 있던 집의 집세 만료기간이 하루하루 다가오면서 마음 역시 점점 조급해졌지만 원하는 가격대의 싼 집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집세 만료기간 삼일을 앞두고 급기야 부동산 중개소라는 '긴급처방전'을 찾을 수밖에 없었는데, 베이징의 부동산 중개료가 무려 한 달치 방값에 해당해서 나로서는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체면불구하고 부동산업자들에게 '돈없는 학생'임을 강조하며 사정사정해서 겨우 얼마간의 수수료를 깎고 깎아 방을 구하는 데 합의를 했다.

이사 가던 날

드디어 이사하는 날. 아침 9시에 집주인과 만나 각종 잡비를 정리하기로 했는데, 일어나보니 9시 15분이다. 밖에서는 문두드리는 소리가 요란하다. 집주인대신 그의 딸이 왔다. 후다닥 일어나 문을 열어주고 정신을 차렸다. 남자친구와 함께 온 집주인딸은 여전히 '멀쩡한' 집 안을 보더니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다.

사실 어이가 없기는 내가 더 없을 판이었다. 이사하는 사람은 나이기 때문에 짐 하나 꾸려놓지 않고 그 시간까지 잠이 든 '본인'은 얼마나 황당하고 괴롭겠는가. 변명하자면 며칠간 너무 피곤해서 짐꾸릴 엄두가 안났다. 나의 철썩같은 신조 중의 하나인 '닥치면 한다'는 정신이 없었다면 그런 무모한 '행위'는 있을 수도 없는 일일 것이다.

짐을 꾸리자니 무엇을 먼저 손을 대야 할지 아득해온다. 잠깐 방 안을 둘러보다 가장 옮기기 무거운 책부터 주섬주섬 가방이란 가방에 죄다 쓸어 담았다. 먼저 그것부터 옮겨놓고 다시 올 참이었다. 얼추 계산해보니 한 열 번쯤은 왔다갔다 해야 짐이 대충 정리될 듯했다. 혼자하는 이사라 짐이 많지는 않았지만 잔손 가는 짐들이 제법 되었다.

첫 짐을 싸들고 아파트 문 앞으로 나오니 그때부터가 문제였다. 그 걸 어떻게 길건너편 새집으로 옯겨야 할지가 갑갑했던 것이다. 그때, 내 눈에 들어온 구세주가 있었다. 바로 '핑빤쳐'로 부르는 자전거 구루마였던 것이다. 잽싸게 달려가 구루마공을 불렀다. 이러저러해서 앞동네로 이사를 가니 짐을 옮길 수 있느냐, 가격은 얼마냐 등 대충 흥정을 하니 연세가 칠순 가까이 들어보이는 그 구루마 할아버지가 흔쾌이 '그러자'고 대답을 한다.

할아버지의 구루마에 책을 싣고 일차 이사를 무사히 마쳤다. 구루마를 타고 가는 동안 나는 쉴새없이 '잔머리'를 굴렸다. "이 할아버지 구루마를 한 여섯 번 정도만 이용하면 대충 다 옮길 것 같은데, 그렇다면 도대체 이 할아버지가 운반비를 얼마나 달라고 할까. 처음 6위안(1위안은 한화 약 160원)에 흥정을 했으니 총 일곱 번 이용한다고 하고 5위안으로 깍아달라고 해야지..."라는 따위의.

일차 이사를 마치고 할아버지에게 짐이 아직도 또 있으니, 이 '차'를 계속 이용해도 되겠느냐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조심스러웠던 이유는 물론 가격흥정을 대비한 사전 눈치살피기였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할아버지 연세가 적지않아 보이는지라 체력이 걱정되기도 했다.

할아버지는 "내 차를 이용하는 건 문제가 아니지만 도대체 옮길 짐이 얼마나 되느냐"고 묻는다. 솔직이 나도 정확히 모르는지라 한 대여섯 번 운반할 분량이라고 했더니 할아버지 인상이 변하신다. 역시 무린가보다 생각하고 있는 순간, 할아버지는 함께 집으로 올라가보자고 하신다. 짐 상황을 보고 판단하잔다. 나는 이미 아무런 대비책이 없었던지라 할아버지의 요구를 순순히 응낙하고 '모시고' 20층 꼭대기 집으로 올라갔다.

집 안으로 들어와서 모든 상황을 파악해버린 할아버지는 내 얼굴을 한번 보더니 끌끌 혀를 차는 것인지, 걱정하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짧은 한숨을 쉬신다. 아마도 '대책없는 아가씨' 정도로 생각하셨을 게다. 잠시 뭔가를 생각하시는 것 같던 할아버지는 나에게 '조금만 기다리라'고 하시며 나가신다. 동료를 불러오겠다는 것이다. 속으로 나는 '도망가는 거야'라고 단정하며 "맘대로 하세요"라고 말하고 다시 대책없는 이사짐을 챙기러 들어갔다.

얼마뒤, 정말로 그 할아버지가 건장한(?)동료 구루마꾼 한 명을 더 데리고 오셨다. 사십 가까이 돼 보이는 그 아저씨는 사람좋게 허허 웃으며 인사를 건넨 뒤 팔을 걷어붙이고 이사짐을 직접 싸는 게 아니겠는가. 옆의 할아버지는 그 아저씨가 싼 이사짐을 밖으로 운반을 한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기적'이 벌어지고 있는 느낌이었다. 나는 이사짐센타 일꾼들을 부른 게 아니었는데 그들은 선선히 내 이사짐을 꾸리고 날라 두 차에 나누어 싣고 운반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얼떨결에 그들과 함께 이사짐을 싣고 새집으로 가는 동안 비로소 '이성'이 되돌아왔다. 여기서 말하는 이성이란 소위 또 '잔머리' 굴리는 것을 말한다. "도대체 이 사람들이 얼마를 달라고 할까. 이사짐까지 싸고 날라주었으니 틀림없이 비싸게 부를텐데 얼마를 줘야 하지. 그래도 한번에 8위안 이상은 절대 못준다고 해야지..."

그들과 함께 그렇게 한 이사는 그후로 총 네 번은 더 왔다갔다 해야 끝이 났다. 그 동안 내가 한 일은 잔짐을 챙기는 것 외에는 거의 없었을 정도로 그 할아버지와 아저씨가 모든 짐을 다 챙기고 날라다주었다. 그것도 새 집 문 안까지 다 날라다 주었으니 혼자한 이사치고는 퍽이나 수월했던 셈이다.

"아가씨한테 돈 더 받아서 부자되고 싶은 생각 없어"

모든 이사가 끝나고, 이제 계산만 하면 진짜 끝이다. 그들이 고마운 건 둘째치고, '흥정'에 들어갈 찰나에는 다시 얄팍한 생각이 고개를 들며 최대한 많이 깍아보겠다는 흡사 전투적인 마음이 되살아났다. "얼마를 드리면 되나요?" 눈치를 살피며 매우 조심스럽게 내가 물었다.

할아버지와 아저씨가 서로 마주보더니 둘다 선뜻 얼마라고 말을 못한다. 나도 긴장이 되었다. 대충 계산을 해보면, 총 다섯 번에 두 차를 이용했으니 한 차당 한 번 오고가는 데 최소 6위안이라고 한다면 못해도 60위안은 줘야 이치가 맞을 것 같았다. 그러나 기본운반 비용 외에 시키지도 않은 이사짐 꾸리는 것에서부터 집 안까지 날라다주는 일까지 다 했으니 배로 달라고 할 것이 틀림없었다. 그들이 주저하는 동안 나의 '잔머리'는 여기까지 굴러왔다.

잠시 후 할아버지는 "아가씨가 알아서 주라"고 말씀하신다. 그런 말은 더 난처하다. 최대한 깍아보겠다는 '심보'인 나에게 알아서 주라고 하면 도대체 얼마를 주라는 소리인가. 속내와는 다르게 나는 "그냥 말씀하세요. 저는 잘 모르겠네요"라고 말했다.

다시 난처한 표정이 된 두 사람은 한동안 머뭇거리더니 결국 원하는 가격을 말한다. 그들이 얼마를 달라고 했을까? 처음엔 내 귀를 의심했다. 그들이 부르는 가격이 생각보다 턱없이 낮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나에게 22위안만 달라고 했던 것이다.

할아버지는 "외국에서 힘들게 공부하는 학생인 것 같은데, 남의 나라에 와서 혼자 살기도 고생인데 이사까지 혼자하자니 얼마나 힘들겠어. 아가씨한테 돈 더 받아서 부자되고 싶은 생각 없으니 그냥 22위안만 주면 돼. 왜? 너무 많은 것 같아?"라고 다소 겸연쩍은 듯 나에게 계산을 요구하신다.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면서 나는 속으로 '오늘은 운수 대박 터진 날인가 보다'고 짐짓 흐뭇해하며 마치 큰 인심이라도 쓰듯 그들이 부른 가격보다 3위안 더 친 25위안을 건네주었다. 잔돈을 건네주시려는 할아버지를 극구 만류하며 "너무 감사했다"는 말을 하며 나는 그들이 마음이 변하기 전에 얼른 가기를 바랐다.

돈을 받고, 더 나를 짐이 있으면 언제든지 다시 찾아오라고 말하는 할아버지와 아저씨에게 형식적으로 "그러죠"라고 인사를 한 뒤 그들과 후딱 작별을 했다.

새 집 방 안에 널부러진 짐을 정리하면서 나는 줄곧 춤이라도 출 듯이 기분이 좋았다. '세상에 나처럼 싼 가격에 이렇게 편하게 이사한 사람 있음 나와보라'고 우쭐대고 싶었다면 경박하다 못해 너무 치사하다고 욕을 얻어 먹을까?

나를 위한 '인정'은 낯선 이국땅에도 있더라

그러나, 나는 저녁 무렵 다시 '인간적인' 사고를 회복할 수 있었다. 그들의 호의를 얄팍한 잔머리로 재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날 정말로 좋은 중국 할아버지와 아저씨를 만났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대충 짐을 정리하고 간단한 청소도구와 살림살이 몇 가지를 사러 근처 종합시장으로 가는 길에 나는 또 그 사십대쯤 되보이는 구루마 아저씨와 마주쳤다. 사들고 올 짐이 제법 될 것도 같고 시장에서 집까지의 거리도 그다지 가까운 건 아니어서 거리에서 두리번두리번 구루마공을 찾고 있는데, 어떤 구르마가 나에게 다가오는 것이다.

내 상황을 말하고 가격 흥정을 하니 그 사람이 10위안을 달라고 한다. 무슨 이사짐도 아니고 간단한 몇 가지 물건 싣고 오는데 10위안이나 부르는가 싶어 부득부득 신경전을 벌이며 가격을 깍고 있는 사이 그 아저씨가 건너온 것이다.

상황을 파악한 아저씨는 "내 차를 타라"고 말한 뒤 나를 싣고 종합시장으로 간다. 사전에 가격흥정은 없었다. 시장에 내려 이 물건 저 물건들을 사다보니 시간이 40분 가까이 흘러 있었다. 대충 물건들을 다 사고 그 아저씨가 혹시라도 갔을까 싶어 얼른 밖으로 나오니 아저씨는 느긋하게 담배를 태우고 있다. 다소 미안하다는 듯 '헤헤'거리며 아저씨 앞으로 가니 아저씨는 얼른 내 물건들을 받아든다.

집 안까지 친절하게 물건을 날라다 준 아저씨는 이번에도 '잔머리'를 굴리며 얼마를 줘야 하나 눈치를 살피고 있는 내게 3위안만 달라고 한다. 40분이나 나를 기다린 그 시간비용까지 계산한다면 3위안은 내 얄팍한 양심으로도 도저히 허용이 안되는 돈이다. 하여, 나는 10위안을 꺼내 건네주며 '정말 감사하다'고 말했다. 서네 차례 잔돈을 건네주시려는 아저씨를 만류하며 다음에도 다시 꼭 이용하겠다며 이번에는 진짜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인사를 했다.

짐을 다 정리하고 청소까지 말끔이 한다음, 잠자리에서 나는 곰곰이 '반성'을 했다. 내가 왜 그렇게 사람의 호의를 먼저 고맙게 여기기 보다는 인정머리 없는 '잔머리'와 '계산속'부터 먼저 차리게 되었는가를.

사실 그렇다. 중국에서 산 사람들은 대충 이해하겠지만, 중국인들과의 모든 거래에서는 최대한 얼마를 깍을 수 있을 것인가 가장 중요한 관심사다. 심지어는 정찰제로 파는 백화점에서도 물건깎는 것이 예사이다보니 일반 시장이나 상점 등에서는 두말 할 필요도 없다. 깎고 또 깎아도 바가지를 썼다는 느낌을 피할 수 없는 게 중국에서 느끼는 솔직한 상거래 문화인지라 뭐든지 깎을 수 있을 때까지 깎고 보는 게 제일이라고 여겨지는 것이다.

때문에 중국에 온 이후 무슨 '거래'를 할 때 상대방의 호의부터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내 '잇속'부터 차리는 것이 이미 내면화된 습관처럼 되버린 것을 부인할 수 없다. 나를 이렇게 얄팍한 사람으로 만든 것이 순전히 중국의 상거래 문화탓이라고 말하고 싶다기보다는 그러한 문화적 요인도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딜 가나 좋은 사람들 고마운 인정들이 있다는 것은 알 만한 나이(?)이건만 이사하는 날 나는 왜 그리도 몰인정한 잔머리만 굴려댔는지...

이사가던 날. 나는 새삼 이렇게 작은(?) 교훈들을 얻었다. 이 넓고 낯선 베이징 안에도 나를 위해 기꺼이 이사짐을 날라줄 따뜻한 이국의 인정들이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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