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스스로 '못난이 철학교수'라고 부르는 윤구병 선생께서 펴낸 책 '조그마한 내 꿈 하나(보리)'를 읽고 또 읽습니다.

머리만 굴리게 하거나 힘을 빼게 만들며 세상을 병들게 하는 글들의 시궁창에서 선생의 글을 읽으니 힘이 솟아납니다. 세상을 제대로 보게 할 뿐 아니라 솟아난 힘으로 병든 세상을 고치게 하고, 힘 약한 이들을 일으키게 하는 글이 진정한 글이라고 강조하는 선생의 뜻을 헤아려봅니다.

곡학아세(曲學阿世)로 판을 치는 자(者)들 때문에 세상이 갈수록 혼란스럽습니다. 어린양들을 잡아먹기 위해 어미로 가장한 늑대, 검은 손에 분을 발라 횐 손처럼 내밀어 양순한 백성을 잡아먹으려는 "양의 탈을 쓴 식자(食者)'들이 우화(寓話)에서가 아니라 현재 세상 도처에 날뛰고 있습니다.

한 시절 독재정권과 잠깐 싸운 대가로 국회의원이 되고 명망가가 되어 혹세무민(惑世誣民)하는 꼴을 보면서 그들의 야욕을 위해 피 흘려 죽어간 민주 원혼들의 곡성(哭聲)이 귀가 아프게 들려옵니다.

훼절한 그 자들을 지켜 본 지리산은 속울음을 참으며 장대비를 휘두르고 한라산은 피울음을 감추며 대설(大雪)을 쏟아부어 입산금지를 시키는지 모릅니다.

'그 놈이 저 놈이나' 마찬가지로 패대기쳐도 좋을 자들이 역사를 장악해 왔습니다. 이 진흙탕 역사를 보면 희망이 없습니다. 하지만 기록되지 않은 민중사에는 자신의 목숨을 저버리며 역사를 발전시킨 힘 있는 사람들의 뜨거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땅 밑바닥에는 그들의 기골 장대한 힘이 흐르고 있습니다. 민중의 기운은 아직 끊기지 않았음으로 다시금 희망의 역사를 불러일으킬 때라고 믿습니다.

곡학아세와 혹세무민으로 역사를 진흙탕으로 빠트리려는 자들의 농간을 지켜보다가 윤구병 선생이 글로 옮긴 '어느 바보의 죽음'을 함께 읽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혼자 삭혀서는 안될 글, 바보로 살도록 만든 역사에 훼절하지 않고 묵묵히 민중을 섬기다 숨진 '아름다운 바보'의 생애를 함께 나눌까 합니다.

"반동의 시대에 인민에게 봉사하려는 사람은 가끔 똥물도 먹어야하고, 가끔 멍청이도 되어야 하는 법이다."

이름 모를 그 분이 남긴 유언을 곱씹어보면서 윤구병 선생의 글을 그대로 옮겼습니다.

충청북도 어느 시골에 농부 한 분이 살았는데 너무 성실하고 총명하였습니다. 이 분은 1920년대에 야학에서 한글을 깨우쳤습니다. 해방이 되기까지 스무 해 남짓 걸핏하면 주재소에 끌려가 치도곤을 당한 행적으로 보면, 한글과 함께 민족 의식도 깨우쳤던 모양입니다.

어떤 때는 하도 많이 맞아서 지게에 실려오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 때마다 똥물을 마시면서 몸을 추슬렀는데 동네 사람들은 '부처님 가운데 토막 닮아서 법 없이도 살 이 분이 왜 이런 고난을 당하는지' 몰랐습니다.

다만 어쩌다 철없는 동네 아이들이 학교에서 배운 왜놈말을 쓰는 걸 보면 몹시 야단을 친다든지, '대동아 전쟁' 말기 왜놈들이 쇠붙이란 쇠붙이는, 하다못해 부러진 숟가락 몽둥이까지 빼앗아 갈 즈음에 제사에 쓰던 유기 그릇들을 땅에 묻어 놓고, 다른 사람들한테도 "그놈들이 유기 그릇을 가져다 어디다 쓰는 줄 아세요? 독립군들 죽이는 총알 만드는 데 쓴답니다"하고 말했던 것으로 보아 미상불 '왜놈'들이 '불령선인'으로 몰아 닥달했음직하다는 짐작만 할 뿐이었습니다.

해방이 되고 나자 이 분은 갑자기 바빠졌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평소에도 이 분이 똑똑한 줄은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 유식하고 지도력이 탁월한지는 모르고 있었습니다. 건국준비위원회, 농민조합, 소작쟁의... 매사에 뛰어난 일꾼이었습니다. 꼼꼼하면서도 너그러워서 인근에 이 분을 믿고 따르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6·25가 터지고 '빨갱이 세상'이 되었습니다. 이분은 '빨갱이 세상'에 적극적으로 부역했습니다. 그러나 천성이 모질지 못해서 '우익반동'을 처단하는 데는 늘 뒷전이었습니다. 그 탓인지는 몰라도 온 나라에서 좌익이 밀 때는 우익 인사들 '줄초상'이 나고 우익이 밀 때는 좌익인사들의 '떼죽음'이 나는 소동이 벌어질 때도 이 분이 사는 곳에서는 서로 죽고 죽이는 드잡이질이 거의 없었습니다.

'인공'이 끝나고 '수복'이 되자 전국 각지에서 '빨갱이 소탕'이 벌어졌습니다. 그 동안 행적으로 보아 이 분도 '죽은 목숨'이었습니다. 그런데 죽지 않고 살아 남았습니다. 모질게 닦달을 당하고 꽤 여러 해 징역을 살았지만 아무튼 겉으로 보기에는 몸 성히 마을로 돌아왔습니다. 들리는 말로는 이 분 덕에 목숨을 건진 우익 인사들이 많았는데 그 사람들이 손을 써서 살아 남았다고 합니다.

머지않아 마을 사람들은 이 분이 아예 바보가 되어 버렸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초롱초롱하던 눈망울에 빛이 사라졌습니다. 사람들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숫제 벙어리가 된 듯, 말이 없었습니다.

"쯧쯧, 그 똑똑하던 사람이 줄창 똥물을 마셔대더니 저렇게 얼간이가 되어버렸어."

처음에는 이렇게 동정하던 사람들도 세월이 지나면서 모두 이 분을 깔보고 천대하기 시작했습니다. 까닭이 있었습니다. 어느 집에 초상이 나면 이 분이 염을 하겠다고 나섰습니다. 썩은 시체를 만지던 손을 씻지 않고 남이 먹다 남긴 음식 찌꺼기를 맨손으로 집어 게걸스럽게 먹었습니다.

동네 궂은 일을 모두 도맡아, 싫은 내색 하지 않고 꾸역꾸역 하는 이분을 처음에는 고맙게 여겨 공치사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란게 참 묘해서 고마운 일을 해주면서도 생색을 내지 않으면 고마운 줄을 모르는 법입니다.

동네 사람들은 이 분이 아무리 자기들을 도와주어도 '바보 저 좋아서 하는 짓'이려니 여겨 나중에는 종놈 부리듯이 부리면서 유세까지 부렸습니다.

황토물이 뻘겋게 밴 고의적삼 차림에 검정 고무신, 덥수룩한 머리와 수염, 가끔 동네 꼬마들을 만나 히죽 웃을 때를 빼면 열릴 줄 모르는 입, 욕을 해도, 흉을 보아도, 손가락질을 해도 바뀌지 않는 천연덕스러운 얼굴 표정, 이 모든 것이 마을 사람들에게는 마음씨 좋은 바보의 상징이었지만 가족들에게는 지울 수 없는 인두 자국이었습니다. 바보 지아비와 아버지를 둔 아내와 자식들이 겪은 수모와 멸시도 엄청났습니다.

이 분은 일흔 살 되던 해 봄에 죽었습니다. 죽기 얼마 전에 마치 자기가 언제 죽을 것이라는 걸 아는 사람처럼, 맏아들에게는 가위로 머리와 수염을 손질해 달라고 부탁하고 아내에게는 깨끗이 빨아 놓은 옷이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부역죄로 감옥에 갔다가 나온 뒤로는 명절날도 새 옷을 찾지 않았던 남편이 생뚱스럽게 새 옷을 찾은 것입니다. 임종이 가까워서 이 분이 자식들에게 남겼다는 말을 간단히 적습니다.

"그 동안 못난 아비 지켜보느라 마음 고생 많았을 것이다. 반동의 시대에 인민에게 봉사하려는 사람은 가끔 똥물도 먹어야 하고, 가끔 멍청이도 되어야 하는 법이다."

태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