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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출판계에는 잘못된 것인지 알면서도 행해지는 몇 가지 이상스런 관행이 있다. 오래 전부터 누누이 그 문제의 심각성이 제기된 '(자사 출판물)사재기'가 그렇고, "이런 책이 팔린다더라"는 소리를 쫓아다니는 '출판의 대중추수주의'가 또 그렇다.

전자의 관행은 베스트셀러가 집계되어 언론에 발표되는 대형서점에서는 속된 말로 '잘 나가는 책'이 지방의 소규모 서점이나 도매상에서는 '죽을 쑤는' 기이한 현상을 초래했고, 후자는 <...해야 하는 100가지 이유> <...하지 말아야 하는 200가지 이유> 등 제목은 물론 내용까지 대동소이한 그렇고 그런 출판물을 우후죽순격으로 양산하고 있다.

출판과 직접 관련된 것은 아니지만, 신간 서적의 꽁무니마다에 따라붙는 '결혼식 주례사'같은 '발문'이나 '비평'도 이유는 짐작되지만 낯뜨거운 관행임에는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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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로부터 <평설 열국지> <삼국지> 평역본 <동주 열국지> ⓒ***


'평역'과 '평설'의 남발은 심각한 문제

중국 고전을 한국어로 번역할 때 너나 없이 쓰고 있는 '평역(評譯)'이나 '평설(評說)'이란 표현도 일종의 출판관행 중 하나로 자리잡은 지 오래. 이 관행에 대해 한양대 중문과 이인호 교수가 문제를 제기했다. <<열국지> 번역 논쟁을 접하며...>란 에세이 형태의 글을 통해서다.

지난 달 중순 춘추전국시대 제후와 영웅의 이야기를 다룬 '열국지' 2종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동시에 출판됐다. '솔출판사'가 간행한 원로한학자 김구용의 <동주 열국지>와 '김영사'가 내놓은 소설가 유재주의 <평설 열국지>가 바로 그것.

책이 출판되자마자 '솔' 측에서는 "유재주의 열국지가 김구용 판 열국지를 저본으로 삼았을 의심의 여지가 있다"며 도덕성과 저작권 문제를 언급했고, 이에 '김영사'는 "열국지 원전에 작가의 견해와 의견을 덧붙여 소설적으로 재구성한 것이기에 문제 되지 않는다"라 맞섰다.

출판사들이 저작권 문제를 중심으로 설전을 벌인 것과는 달리 이교수가 문제의 핵심으로 지적한 것은 '평역' 혹은 '평설'이 정확한 개념규정 없이 마구잡이로 사용되는 현실에 대한 우려다.

이교수는 '중국 명나라 청나라 시대에 등장한 문학비평가들이 고전 소설을 읽으며 원서 상단에 간명하면서도 심도있게 코멘트 해놓은 것이 바로 평(評)'이라며 '중국 고전소설을 편역하면서 '평'이란 용어를 넣으려면 남의 나라 이야기가 아니라 자신만의 독특한 사관 및 문학론이 구비되어 있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중국 고전을 번역 혹은 편역하기 위해서는 '판본(板本) 선택의 정확성'과 '원문 해독 능력' '유려한 한국어로 풀어낼 능력'이 선행되어야 한다며, 판본을 떳떳하게 밝히지 못하고, 원문 해독 능력에 자신이 없다면 '평역'이나 '평설'이란 용어보다는 '편역(편집하여 바꾸어 옮기는 것)' 또는 '편저(편집하여 저술하는 것)'로 쓰는 것이 옳다는 것이 이교수의 주장.

그는 또 '유가사상의 정통 관념을 소설 형식을 빌어 표현한 <삼국지연의>를 '평역'이란 미명 아래 자의적으로 원문을 넣고 빼고 했다면, 소설적 재미는 있을지언정 잘한 일이라 할 수 없다'라는 표현으로 삼국지를 '평역'한 소설가 이문열를 간접적으로 언급하기도 했다.

이인호 교수는 <평설 열국지>가 '유재주 지음'이라고 표기된 것에도 문제를 제기했다. '원문을 편역했으면서 아무개 '지음'으로 (책이)출판되는 건 상식 밖의 일'이라는 것.

출판사와 작가들의 견해는?

이교수의 주장을 접한 출판계 인사와 문인들의 반응은 다양하게 엇갈렸다.

먼저 <평설 열국지>를 출판한 '김영사'의 김기중 문학팀장은 '평설이란 비평하여 설명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나는 꼭 이러한 사전적 의미로 평설이라는 말을 붙인 것이 아니다. 해설을 곁들인 소설이라는 작의적인 의미에서 평설이라는 말을 앞에 붙였다'는 유재주 씨의 저자서문을 읽어보라며 "성경을 번역하는 번역자 모두가 히브리어에 정통할 수 없듯이 열국지는 여러 판본이 있고, 그 판본을 토대로 여러 작가가 여러 해석을 곁들여 쓸 수 있는 것 아닌가"라고 반박했다.

이와 함께 김씨는 "열국지 판본을 토대로 했지만, 역사적 사실과 상황묘사에 있어서는 작가적 상상력과 재해석이 가미되었"으므로 '유재주 지음'이라는 표기도 잘못되지 않았다는 자신의 뜻을 분명히 전했다. 그는 또 "원문 번역에 충실한 작품이 있는 것처럼 소설적 재미가 덧붙여진 작품도 있을 수 있고, 선택의 권리는 독자의 몫"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반면, 문학평론가 방민호는 "고전문학 전공자가 아니라 잘은 모른다"면서도 "평역 혹은 평설이란 용어를 사용하려면 작품의 재해석과 재창조가 괄목할 만큼 이뤄져야 하는데 한국에서 평역, 평설이란 이름을 달고 출간된 책이 그만큼의 공력을 들였는지에 관해서는 회의적"이라고 말해 평역, 평설의 남발은 잘못된 관행이다라는 주장에 힘을 실어줬다.

실지로 현장에서 소설창작을 하고 있는 작가들의 의견도 여러 가지.

원로소설가 현기영은 "자기 스타일과 자기 해석대로 썼다면 (평역이나 평설보다는)'번안소설'이라 하는 것이 옳다"며 "엄연히 원작자가 있는 저작물의 번역본에 '아무개 지음'이라고 표기하는 것은 일종의 날조 아닌가?"라 반문했다.

"어떤 의미에서 평설이라 이름 붙였는지는 짐작은 한다. 그러나, 원본 열국지의 내용과 구성, 줄거리가 엄연히 있는데 역자를 지은이라고 칭한 것은 과하다. 하지만 평역이나 평설이란 용어의 사용은 고질적인 출판관행이고, 이에 대해 작가 개인이나 한 출판사에게 책임을 묻기는 어렵지 않겠는가"라는 것은 소설가 최인석의 견해.

불교경전 등을 다수 번역한 바 있는 소설가 박일문은 "한자해독 능력이 있는 박종화(소설가. 타계)의 삼국지나 이문열의 삼국지 평역본은 고전 읽기의 어려움을 일정 부분 해소하기도 했다"는 말로 잘된 평역 혹은 평설이라면 굳이 폄하할 필요가 없다는 뜻을 전한 뒤 "하지만, 평역이나 평설이 새로운 작품을 만드는 것이 아닌 다음에야 원작 아무개, 평역(평설) 아무개라고 하는 것이 원칙이 돼야 한다"고 덧붙였다.

'평설'과 '평역' 사용에 관한 원칙 있어야

'평역'과 '평설'이란 용어의 사용이 명백히 잘못된 출판계의 인습인지, 아니면 고전 해석의 다양성 부여를 위해 유연하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지는 한두 사람의 한두 마디 의견으로 왈가왈부될 성질의 것은 아니다.

하지만 붕괴의 위험성이 거론되는 한국 출판계를 위해서라도 평역과 평설 사용에 관한 '최소한의 원칙'은 합의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 이유로 "'출판사에서 많은 수의 번역문과 원문을 비교해보고는 절망감을 느꼈다"는 평론가 황광수의 말은 새겨들을 만한 가치가 있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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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가 황광수 ⓒ홍성식
"번역의 첫째 원칙은 원문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이다. 역자 개개인이 각자의 해설을 붙이는 것을 문제삼을 생각은 없다. 하지만 그 해설이란 것도 원문에 충실하여, 원전의 맛을 제대로 전하려는 노력이 저변에 깔려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자의적이고, 주관적인 해석의 함정에 언제든지 빠질 수 있다. 비단 (중국 고전)소설만의 문제가 아니다. 노장(老莊. 노자와 장자)과 공맹(孔孟. 공자와 맹자)도 마찬가지다. 원문 이해력이 없으니, 해석의 오류를 범하는 것 아닌가.

일부 작가들이 떨어지는 원전 해석력을 상상력만으로 땜질하고 있는데 이는 심각한 폐해를 부를 수 있다. 이문열의 <삼국지> '평역'본도 그렇다. 아무리 저작권을 주장할 주인이 없는 작품이라 할지라도 명백히 원전이 있는데 이를 고려치 않고 자신의 뜻대로 해석한 것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런 책을 읽고 성장한 세대들은 고전 원래의 맛과는 상관없이 이문열의 삼국지만을 삼국지로 착각할 가능성이 다분하다. 다시 말하자. 번역의 첫째 원칙은 원문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래는 이인호 교수의 글 전문.

<열국지> 번역 논쟁을 접하며...

중국과 중국인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면서 관련 역저(譯著)가 봇물 터지듯 쏟아지고 있다. 특히 중국 고전을 번역 혹은 편집하여 출간하는 예가 폭중하면서 원문 해독이 힘든 일반 독자들에게는 매우 즐거운 소식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중국 고전을 번역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소양이 있는데 이런 점들이 종종 무시되어 독자들은 판단 기준도 모르고 광고 문구나 겉표지에 현혹되어 관련 서적을 선택하고 있는 실정이다.

중국 고전을 번역 혹은 편역하려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작업이 판본(板本) 선정이다. 같은 이름의 중국책이라 할지라도 고전의 경우는 출판 연대와 출판자에 따라 자구(字句)의 같고 다름이 있으므로 가급적 교감이 잘 된 선본(善本)을 채택해야 한다. 그러한 선본이 없다면 편역자가 다양한 판본을 비교 검토하면서 직접 교감하는 수밖에 없다. 이 작업을 거르면 원문을 아무리 깔끔하게 번역해도 오역이다.

둘째는 원문 해독 능력이 있어야 한다. 기존의 번역물을 참고하거나 일본어로 번역된 것을 옮겨와서는 단지 중역(重譯)의 문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번역자의 양식과 국자적 자존심이 문제 될 수 있다. 셋째는 유려한 한국어로 풀어야 한다. 서당 선생의 말투로는 이 시대의 리듬과 호흡을 따라잡을 수 없다.

이상 3가지 점은 중국 고전을 번역하는데 있어서 최소한의 요구사항인데 이를 잣대로 시중에 출간된 중국 고전을 보게 되면 가슴이 벌렁거린다. 특히 중국고전 소설을 번역하는 경우 편역자의 상당수가 서문에서 판본도 밝히지 않았으며, 원문 해독 능력에 의심이 가는 분들도 더러 보인다. 이런 분들이 대개 강세를 보이는 부분은 번역에 있어서 가장 끄트머리를 장식하는 유려한 한국어 구사능력인데 일반 독자가 아니라 전문가의 입장에서 보면 주객전도라 아니할 수 없다.

우리에게 익숙한 나관중의 장편 역사소설 <삼국지>의 본명은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인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대목은 '삼국지'가 아니라 '연의'이다. 유가사상의 정통 관념을 소설의 형식을 빌어 표현했다는 뜻이다.

이런 소설을 모 소설가가 평역(評譯)이란 미명 아래 자의적으로 원문을 넣고 빼고 했다면 재미는 있을지언정 잘한 일이라 할 수 없다. 평역이란 용어가 등장한 이후 유사한 용어를 접두사로 붙여 우후죽순처럼 중국 고전이 번역되었다. 그중 하나가 평설(評說)인데 용어만 다르지 실은 같은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다.

중국 고전소설을 편역하면서 무릇 '평(評)'이란 용어를 넣으려면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자신만의 독특한 사관 및 문학론이 구비되어 있어야 한다. 중국 명나라 청나라 시대에 등장한 문학비평가들이 고전 소설을 읽으며, 원서 상단에 간명하면서도 심도있게 코멘트 해놓은 것이 바로 '평(評)'이다.

판본도 떳떳하게 밝히지 못하고 원문 해독 능력에도 자신 없으면서, '평역'이나 '평설'이란 용어로 넘어갔던 그동안의 관행은 잘못이었다. 하물며 원문을 편역했으면서 아무개 '지음'으로 나가는 것은 상식 밖의 일이다. 그저 참하게 '편역' '편저' 정도로 했으면 한다.

요컨대, 편역자들은 판독 선택과 원문 해독 능력을 제고시키고 그것이 당장 힘들다면 최소한의 덕목으로서 서명 선택 및 편저자 명칭에 신중을 기하자. 이와 동시에 자칭 전문가들은 작가 못지 않게 유려한 한국어 번역 능력을 갖추도록 노력해야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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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꽃> <한국문학을 인터뷰하다> <내겐 너무 이쁜 그녀> <처음 흔들렸다> <안철수냐 문재인이냐>(공저) <서라벌 꽃비 내리던 날> <신라 여자> <아름다운 서약 풍류도와 화랑> <천년왕국 신라 서라벌의 보물들>등의 저자. 경북매일 특집기획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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