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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여름방학은 유달리 긴 편입니다. 대략 오월 둘째 주부터 팔월 세째 주까지 이어지는 방학 동안, 유학생들 가운데 한국을 다녀오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가족들이 미국을 방문하기도 합니다.

제가 살고 있는 학교 아파트 단지 안에서도 방학 때가 되면 자녀를 만나기 위해 방문한 부모님들을 종종 뵙곤 합니다. 특히 결혼한 유학생의 경우, 임신하게 되면 산모를 돕느라 출산 때에 맞추어 부모님들이 오시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오늘 오후에 뜻하지 않는 손님을 맞게 되었습니다. 제 아내와 한 동네에서 자랐던 이 곳 유학생의 부인이 임신을 하게 되자 그녀의 어머니가 오신 것이었습니다. 딸 집에서 머물다 제 아내가 생각나서 얼굴이라도 보고 가려고 한다며 잠시 들르셨습니다.

점심 시간이 지난 터라 차 한잔씩 마시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던 가운데 그 분이 저희에게 언제 아이를 낳을 계획인지 물으셨습니다. 저희는 나이도 많지 않은 데다가 각자 공부하는 것도 있고 해서, 아마도 공부 마친 후에 한국에 돌아가서 낳을 것 같다고 말씀드렸지요.

그러자 함께 오신 세 분이 동시에, 아이는 반드시 미국에서 낳아야 한다고 정색을 했습니다. 미국에서 아이를 낳으면 한국보다 훨씬 더 좋은 환경에서 많은 혜택을 받을 수 있다는 말을 덧붙이시더군요.

그러나 더욱 어이가 없었던 것은 아이에게 미국 시민권을 주는 것이 부모로서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 중의 하나라는 것이었습니다. 순간 너무 황당하기도 하고 나이 드신 분께 대놓고 반박하는 것이 좋지 않아서 그저 저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고만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본인의 주장은 확고하다는 듯, 나중에 아이가 자라서 미국 시민권을 포기하더라도 어느 국적을 선택할 것인지는 아이에게 맡겨야 한다는 이야기까지 하시더군요. 더욱 놀라웠던 것은 그 나이 드신 아주머니의 말씀에 전적으로 동감한다는 그 젊은 부부였습니다.

저희 부부와 나이차가 많이 나지도 않은 그 분들 역시, 유학생에게 주어진 큰 장점 가운데 하나를 왜 포기하려 하느냐고, 다시 한 번 생각해보라고 조언을 하시더군요. 이건 서로를 설득시킬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생각이 다르다는 말만 하고는 길게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그 분들이 돌아가고 나서 한참동안 생각해 보았습니다. 과연 '미국 시민권'이라는 것이 부모가 아이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인지, 아니 그 '미국 시민권'이라는 것이 그렇게 대단한 것인지 말입니다.

물론 모든 유학생들이 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또한 저희 부부 역시 언제가는 이 곳에서 아이를 낳게 될지도 모릅니다.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그 젊은 부부가 가지고 있을 '조국'이라는 개념에 대한 가치관의 차이는 납득하기 어려울 정도였습니다. 제 스스로 혼란스러울 만큼 말입니다.

얼마 전에 제가 살고 있는 달라스 지역의 인구조사 내용이 발표되었습니다. 단순한 총 인구뿐만 아니라 각 인종별 혹은 출신 국가별 인구수까지 함께 발표가 되자 한인사회에서는 잠시 충격을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총 한인들의 수가 그 동안 한인단체에서 주장했던 수에 크게 못미쳤기 때문입니다.

그 이후 이 곳 교포 신문들에는 한국 사람들이 더 많이 이민을 와야 한다는 식의 비슷한 기사가 계속 실렸습니다. 쉽게 말해, 한국이라는 좁은 땅덩어리에서 아웅다웅하지 말고 넓은 미국으로 이민을 와 개인의 능력도 발휘하고 한국인의 저력도 키우자는 이야기였습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이민에 반대하지 않습니다. 사람마다 자기의 여건과 환경에 따라 이민을 선택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앞서 제가 언급했던 아이에게 미국 시민권을 주자는 분들의 주장은 이민에 찬성하느냐와는 별개의 문제가 아닌가 싶습니다.

왜냐하면 '미국 시민권'을 선물로 간주하는 생각의 이면에는 한국을 미국보다 낮게 여기는 마음이 그 바탕에 깔려 있다는 의구심이 들기 때문입니다. 덧붙여 경제적으로 윤택한 환경이 조국이니 국가니 하는 피상적인 개념보다 앞선다는 전제에서 출발하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과연 그럴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지 않습니다. 물론 저는 국가가 개인에 우선한다고 생각하는 국가주의자도 아닐 뿐더러 국수주의자는 더 더욱 아닙니다. 그러나 학교 운동장에 열맞춰 애국조회에서 맹세하던 그 '조국'은 아니더라도, 얼룩무늬 제복을 입고 연병장에 모여 외우던 복무신조의 그 '국가'는 아니더라도 내 가슴에 새겨 있는 조국의 이름은 한갓 종잇장에 불과한 '미국 시민권'과 비교할 수 없다고 믿습니다.

세계가 열려 있고 누구나 다 세계화를 부르짖으며 세계시민사회를 주창하는 마당에 왜 그리 옹색하게 닫혀 있느냐고 물으실지도 모르겠군요. 그러나 한 개인의 조국애가 세계는 하나라는 이념에 장벽이 된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사랑 없는 다른 이들과의 연합은 그 기초부터가 부실하기 때문에 굳건할 수 없다고 믿습니다.

북한에서 교육을 받은 후 국적을 중동국가로 조작하고 한국에 교수로 와서 간첩행위를 하다 구속된 '무하마드 깐수'라는 북한사람을 기억하실지 모르겠습니다. 그의 한국 이름이 무엇인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 지금도 어느 깊은 감옥에 구속중일 것입니다.

당시 그의 철저한 신분 위장으로 사회가 떠들석했습니다. 현직 교수 신분으로 신분을 위장한 채 대학에서 강의를 하며 간첩행위를 했으니 말입니다. 그런 그가 체포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어느 기자가 그와 인터뷰한 기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 인터뷰에서 그 기자는 그 남파간첩에게, 한국에 들어온 후 이 곳의 경제 발전상을 보고 그간 북에서 받았던 남에 대한 교육이 가짜였음을 알았을텐데 왜 자수하여 이 곳에 귀순할 생각을 하지 않았냐고 물었습니다. 다른 대답들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 물음에 대한 기억만은 또렷이 기억이 납니다.

'조국은 그런 게 아니다'였습니다. 가난하다고 버리고 부유하다고 취할 성질이 아니라는 요지의 답변이었을 것입니다. 비록 그가 간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대답이 전략적이었는지의 여부와 관계없이 그의 생각하는 태도만은 제게 큰 도전이었습니다.

그러나 미국 시민권과 관련해서는 여전히 혼란스러움이 남습니다. 제가 여기 미국에서 공부하고 있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앞으로 제가 아이들에게 '대 아메리카 합중국'의 자랑스러운 증명서보다 더 큰 무엇인가를 보여줄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 때문일까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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