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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큰 문제제기를 하고 싶어 글을 올리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저께 신문에 난, 백여명이 넘는 지식인들의 '안티 조선' 공동선언에 관한 기사를 읽고 몇 가지 느낀 점이 떠올라 이렇게 기사를 씁니다. 각설하고요.

지식인 운동의 양상이란, 지식인 그 자체가 이미 모호한 개념인 만큼, 천차만별로 드러납니다.

Vichy정부 시기의 사르트르가 보여준 전투적이고 섹터적인 저항방식, 그 이후 그가 보여준 비논리적일 정도로 전방위적이고 도덕적인 운동방식이 있는가 하면, 부르디외가 이끄는 '지식인 그룹'처럼 약간 돌출적인 방식으로 미디어를 이용하는 그런 부류의 운동양태도 있지요.

물론 후자의 경우 저작활동을 통해 이론적/과학적 개입 근거를 생산하면서, 동시에 미디어를 통해 정세적으로 국면에 개입해 들어가기 때문에 '돌출적'이라는 수사는 조금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들이 개입근거로 삼는 자신들의 학문적 결과물들은 결코 돌출적으로 생산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재미삼아 이 부르디외에 대해 잠시 이야기해 볼까요.

작년 10월인가 이 부르디외라는 양반이, 사르트르 보다는 훨씬 온건한 방식으로, 하지만 훨씬 쇼킹한 방식으로 파리에 모인 세계 미디어 재벌들에게 일갈 했던 일을 기억하실 겁니다.

'세상의 참주인들에게 질문함(Questions aux vrais maîtres du monde)'이라는 공격적인 제목 하에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을 인용해가면서 그가 읽어 내려간 성명서는 곧장 여러 일간지들에 전문으로 게재되었습니다. 뭐, 별 내용이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만, 미디어 재벌들에 의한 문화 상품들의 단일화/획일화를 비판하면서, 문화에 대한 지나친 상업화나 그에 따른 획일화는 "예술의 생태적 조건들을 파괴하여 종국에는 예술과 문화를 죽일 것"이라고 비판하는 글이었지요.

그 후로 1~2주 동안 여러 신문 의견란에는 부르디외에 대한 비판과 반비판으로 가득 메워져, 신문 읽는 재미가 쏠쏠했던 기억이 납니다. 뱅상 뚜르니에(Vincent Tournier)같은 이들은 '피에르 부르디외, 혹은 엘리트들의 문화(Pierre Bourdieu, ou la culture des élites)'라는 반박문에서 부르디외가 가진 엘리트주의적 문화관을 비판했지요.

사실 제가 보기에도 부르디외의 반박문에서는 대중문화에 대한 ‘애정’을 거의 찾아볼 수가 없었거든요. 곰브리치처럼 문화 일반을 예술의 생산을 위한 중요한 조건들로 파악하고 있는 반면, 그 자신의 본분이어야 할 대중문화 자체에 대한 사회학적 분석을 성명문에서 '과감히' 생략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말입니다.

물론 공개적인 토론장으로 스스로 몸을 낮추어 '강림'한 것일 테니 그렇게 많은 것을 바랄 수는 없겠지요. 자신의 저서들을 참고하라는 말일 수도 있겠구요. 그렇다고 조지 루카스가 부르디외의 책을 펼쳐 보지는 않았을 겁니다.

제가 지식인들의 안티조선 공동성명을 보면서 굳이 부르디외를 떠올린 이유는, 바로 부르디외 진영과 반부르디외 진영 사이에서 벌어졌던 이런 논쟁, 그러니까 하다못해 '낮은 수준에서의 학문적 논쟁'조차 남한의 지식인들 사이에서 찾아볼 수 없다는 점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저도 정과리씨와 고종석씨 간의 토론기사와 이문열씨 인터뷰 기사를 보기는 했습니다만, 이것은 논쟁이라기보다는 방담에 가까운 수준이더군요. 민중문학의 논리를 날카롭게 파헤쳤던 예전의 논객 정과리씨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그의 대응은 좀 게으른 편이었습니다(솔직히 말하면 조금은 기대도 했었거든요). 이문열씨의 경우야 말할 필요도 없겠지요.

이 정도되면 참다운 논쟁의 부재가 갖는 의미를 한번쯤은 생각해 봐야 될 것 같은데요. 남한 사회의 지식인들이 모두 '안티 조선' 테제에 찬성하고 있거나 혹은 심정적으로 동조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류의 성명이 정치적 의제로서 기능하지 못하는 건 아닐 터입니다. 많은 우파 이데올로그들이 판을 치고 있다는 건 우리 두 눈으로 매일 확인하고 있는 사실이니까요.

그럼에도 무엇보다 이해하기 힘든 점은 황석영씨 파문이나 이번 공동성명에 대해 성실히 대답하고 나서는 우파 지식인들을 찾아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과연 우파 지식인들이 조갑제씨 정도로 대표될 만큼(김어준씨나 김규항씨가 자주 언급하는 것처럼) 질이 낮은 탓일까요?

제가 보기에 이런 현상은 지금 남한 지식인 사회의 이데올로기적 구획선이 잘못 설정되어도 한참 잘못 설정되어 있기 때문에 나타나는 듯합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먼저 남한 사회 전반의 이데올로기적 지형에 관한 제 단견을 간략히 서술해 보지요.

정권교체 혹은 남북교류로 불거진 '자유로운' 사회적 분위기가 실제 남한 사회의 이데올로기적 방향성을 보는데 오히려 방해로 작용하진 않나 그런 생각까지 드는데요. 경제적 심급에서의 이데올로기 좌표가 명백히 신자유주의로 정향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정치/사회적 층위에서는 신보수주의의 보편화가 잘 언급되지 않는 기현상을 느끼신 분 많으실 것 같습니다.

이른바 경제-정치 심급에서의 '이념적 비대칭'이 남한 사회에 존재한다는 이야기일 테지요. 신자유주의라는 경제적 운용원리의 정치적 대당이 반드시 신보수주의일 필요는 없으나 아시다시피 그러한 조합이 역사적 자본주의의 한 단계로서 엄연히 존재했고 지금도 지배적으로 존재하는 이념쌍임을 기억한다면, 지금까지 김대중씨가 벌여온 개혁이 신보수주의적 정치 개혁과 신자유주의적 경제체질 전환을 쌍두마차로 진행되어 왔다는 것이 분명한 사실처럼 보이는 데도 말이에요.

조금 조악하게 비교해서 말해보자면, 김대중 정권의 개혁은 블레어-기든스 쌍의 약간 오른쪽에, 그리고 죠스팽 내각이나 지금은 사임한 프로디 내각의 개혁보다는 훨씬 오른쪽에 위치해 있는 것 아닌가 싶거든요.

<안티 조선> 테제가 은근슬쩍 보여주면서 동시에 은폐하고 있는 이념 지형의 단면은 바로 이 사회 자체에 팽배한 신보수주의적 분위기입니다. 일견 <조선일보>라는 극우세력과 '다수의 진보적 지식인' 간의 충돌로 보이는 이런 전선 구도에서, 대다수 진보적이라 일컬어지는 지식인들이 최근 보이고 있는 전반적인 보수화 현상은 논의에서 자연스럽게 제외되고 있지요.

몇몇 분들을 제외하고서는, 현재 진행되고 있는 신자유주의적 개혁방향에 대해 계속적으로 비판하시는 분들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이며, 그것도 시애틀 라운드에서 '대규모 폭투'를 감행했던 여러 NGO들을 지지하는 수준이지, 실제 남한 사회의 경제 시스템에 대해서 비판적 대안을 제시하시는 분이 드물지 않습니까.

물론 기술적인 분배 전략들에 몰두하시는 연구자들이 많기는 하지만, 이 분들을 남한 정부의 경제 운용 이념에 대해 비판적이라 평가하기는 왠지 아쉬운 점이 많구요.

이렇게 보면 현재 지식인 사회에서 이데올로기적 기준점 역할을 하는 것은 이 신자유주의라는 괴물은 아닌 듯합니다(이조차도 정당한 준거점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분이 계시다면 적극 동감입니다).

오히려 대부분의 지식인들이 정부 주도의 신보수주의적 개혁틀과 그로 인해 파생된, 자유롭지만 동시에 보수적인 사회 분위기 속에서 자신의 '진보성'을 편안히 자리매김하고 있다고 보아야 하는 것 아닐까요.

<조선일보>라는 문화권력이 정권이 바뀌고 나서도 계속해서 비대해 지고 있다는 사실은, 물론 김대중 정부의 한계를 보여주는 일이기도 합니다만, 그보다는 이 신보수주의의 전사회적 보편화를 방증하는 사례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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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티 조선' 움직임에 대해 생산적인 논쟁이 벌어지지 않는 이유는, 지식인 사회 스스로가 자신에게 적용하는 이념 지형도가 이처럼 심하게 왜곡되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따라서 이 성명에 성실히 답해야 할 우파 지식인이란, 애당초 한줌도 안되는 <조선일보>의 주필진이나 단골필진들 – 김학준씨나 지만원씨 같은 분들이 아니었던 셈이지요.

이 성명은 바로 성명서에 서명한 지식인들, 혹은 서명하지 않은 대다수 진보적인 지식인들이 자기 자신과 논쟁을 가질 수 있는 기회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경우 우리는 문제의 성명서를 지식인들의 '자기반성'처럼 읽어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별로 그런 것처럼 보이지는 않더군요. 얼마 전 김정란씨의 인터뷰 기사에서, '안티 조선'이 가질 수 있는 포지티브 전략에 대해 질문 받고서는, '<한겨레> 밀어주는 게 뭐 나쁜가요' 식으로 대답하는 걸 본 적이 있습니다(기억이 잘 나지 않으니 정확하지 않았다면 지적해 주세요).

신보수주의적 스펙트럼 하에서 진보성이란, <조선일보>를 극우로 지칭하면서 동시에 <한겨레>의 논조를 진보적이라고 받아들이는 정도를 말하는 모양이구나.. 라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저의 과민반응이었을까요. 저랑 비슷한 생각하신 분들 많으리라 믿습니다.

지식인 스스로가 독백적으로 자신의 이념적 균형을 잡는 것은, 알튀세의 예에서 보여지듯이 미치도록 힘든 예가 아닐까 싶습니다. 반면에 남한의 지식인들은 좀 게으른 것이 아닌지 반문해 보고 싶군요.

자신이 진보적일 수 있는 이념적 근거와 그 상대적 환경에 대해서 스스로 반성해 본다는 것이 역시 쉬운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민주노동당'의 침묵과 이번 성명을 함께 바라보면서 지식인 운동의 한계에 대해 생각해 봤습니다.

* 다음에는 김대중씨도 우려했다는 반미감정에 대해 제가 느낀 바를 올려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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