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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김영균 / 사진 노순택 / 동영상 곽기환 기자

막 내리는 '영웅시대' 소설가 이문열 씨의 책 733권이 고물상에 넘겨졌다. 책값은 현재 발행되는 최저 화폐액면가인 10원이었다.
ⓒ 오마이뉴스 노순택


"다시 한 번 묻겠습니다. 책을 받을 의사가 없습니까? 이문열 씨의 책 733권을 지금 돌려받지 않는다면 그대로 고물상으로 가져가 단돈 10원에 팔아버리겠습니다."

경기도 이천시 마장면에 위치한 소설가 이문열 씨의 작업실 '부악문원'. 3일 오후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이문열돕기운동본부(본부장 화덕헌)> 참가 회원들이 오후 2시부터 이색시위를 벌였다. 부악문원은 지하 1층 지상2층짜리 건물로 지난 98년 1월 이문열 씨가 집필과 후학양성을 위해서 세운 곳이다.

'인물과 사상을 사랑하는 독자모임'(인사모) 소속 회원들이 주축이 된 <운동본부> 참가자 40여 명은 이날 2시 10분부터 서이천 톨게이트 앞 고속도로에 모여 북과 꽹과리를 앞세워 도보행진으로 집회를 시작했다.

이문열책 장송하다 / 곽기환 기자


행진 대열의 맨 앞에는 <운동본부>에 부모와 함께 참석한 정하림(10) 양이 '이문열 소설' 표지들이 그려진 영정을 들고 섰다. 바로 뒤쪽에는 8명의 참가자들이 광목끈으로 받친 널빤지 위에 책들을 쌓아 관을 운구하듯 좌우로 나누어 들었다. 10명의 <운동본부> 참가자들이 하얀 유골함 10개를 들고 그 뒤를 이었다. 유골함 속에는 이문열 씨의 책들이 들어 있었다. 하얀 종이로 포장된 유골함 앞에는 <레테의 연가>, <사람의 아들>,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 등 익숙한 제목의 소설 표지들이 붙어 있었다.

이날 '부악문원' 앞에 모인 이 책들은 <운동본부>가 책 반납운동을 벌인 뒤 전국 각지에서 적게는 1권, 많게는 15권씩 자기가 소장하고 있는 '이문열 책'을 직접 가지고 오거나 택배로 부쳐진 것들이다.

▲ 앞장서는 책 '영정', 뒤따르는 책 '관'.
ⓒ 오마이뉴스 노순택

10분 정도 이동해 도착한 부악문원 앞에는 이날 행사를 반대하기 위해 참석한 '민주참여네티즌연대'와 '안티DJ' 소속 회원 30여 명이 "홍위병의 지식인 테러와 언론탄압 행위를 중단하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기다리고 있었다.


"홍위병의 지식인 테러 금지하라" 반대 시위

이들은 또 "한겨레 기자의 양심선언으로 언론탄압 실체가 드러났다" 등의 구호를 적은 피켓을 들고 부악문원 앞을 막아섰다.

"홍위병들은 지식인 테러와 언론탄압을 중단하라"민주참여네티즌연대 등 이른바 '청위병'들은 부악문원 앞을 가로막고 잠시 대치를 벌였다.
ⓒ 오마이뉴스 노순택
<운동본부> 소속 참가자들은 이들과 마주쳤지만 별다른 마찰없이 2시 20분경 부악문원 앞 도로에서 예정된 집회를 시작했다.

이날 행사는 "한 시절 천재작가의 곡학아세를 장송하며"라는 제목의 조시(弔詩)가 낭독되면서 시작됐다. 인사모 소속 회원으로 서울에서 이번 행사에 참가한 김문경(20, 대학생) 씨가 낭독한 '조시'는 11월 3일을 "지성의 새 이정표를 세우는 날"로 표현하며 "지역감정 조장, 이념의 올가미, 색깔론의 묘수를... 태평양 바다로 날려버리자"는 내용을 담고 있다.

한 시절 천재 작가의 곡학아세를 장송(葬送)하며

...(전략)

2001년 11월 3일
민초들의 결의가 찬란한 슬픔의 띠를 두르고
너울너울 덩실덩실 춤을 추는 날
뜨겁고도 정갈한 슬픔 속에서
새 희망이 힘껏 용솟음하는 기쁜 이별의 날
한 시대의 난분분한 곡절이 한 고비의 나래를 접고
장엄한 의미의 꽃을 피우는 날

...(중략)

▲ '장례식'에 참석한 '조문객'들은 '죽은 책'을 위로하는 헌화의 시간을 가졌다.
ⓒ 오마이뉴스 노순택
오늘 이 자리에 세워진 시대의 이정표 앞에서
우리가 하나하나 내던지며 부르는
우리의 기쁘고도 슬픈 장송곡이 거센 바람이 되게 하소서
저 편견과 아집의 성곽 위에서
오늘도 도도히 나부끼는 몰염치의 단색 깃발로부터
지역감정 조장의 술수를 이념의 올가미,
색깔론의 묘수를 침소봉대, 왜곡축소, 적반하장
끊임없는 기만과 권력욕의 만용을
저 태평양 바다로 날려버리게 하소서

...(하략)


한편 참가자들은 '조시'가 낭독되기 시작하면서 집회 참가자들 앞에 놓인 '책'들 위에 죽음을 애도하는 흰 국화를 한 송이씩 놓았다.

조시가 낭독된 후, 곧바로 이범우(21, 대학생) 씨가 '조책문(弔冊文)'을 읽었다. '조책문'은 조선시대 작품인 '조침문(弔針文)'을 패러디한 것으로 진중권 씨가 직접 작성해 보낸 것이다. 진 씨는 이 글에서 '독자의 분노로 찢어진 책'을 애도하는 마음을 표현했다.

"... 금년 시월 초십일 술시(戌時)에, 희미한 등잔 아래서 신문 읽다 열받아서, 무심중간(無心中間)에 뿌지직 찢어내니 깜짝 놀라와라. 아야 아야 책이여, 두 동강이 났구나. 정신(精神)이 아득하고 혼백(魂魄)이 산란(散亂)하여... 편작(扁鵲)의 신술(神術)로도 장생불사(長生不死) 못하였네. 동네 장인(匠人)에게 때이련들 어찌 능히 때일손가. 한 팔을 베어낸 듯, 한 다리를 베어낸 듯, 아깝다 책이여. 책장을 만져보니, 꽂혔던 자리 없네...

오호 통재(嗚呼痛哉)라, 문열(文烈)이 삼가지 못한 탓이로다. 무죄(無罪)한 너를 마치니, 백인(伯仁)이 유열이사(由烈而死)라, 누를 한(恨)하며 누를 원(怨)하리오. 그 자의 능란(能爛)한 성품(性品)과 교활(狡猾)한 성질을 내 다시 어찌 말리리오. 너의 절묘(絶妙)한 의형(儀形)은 눈 속에 삼삼하고, 특별한 품재(品才)는 심회(心懷)가 삭막(索莫)하다. 네 비록 물건(物件)이나 무심(無心)ㅎ지 아니하면, 후세(後世)에 다시 만나 평생 동거지정(同居之情)을 다시 이어, 백년고락(百年苦樂)과 일시 생사(一時生死)를 한 가지로 하기를 바라노라. 오호 애재(嗚呼哀哉)라, 책이여. 상향"


ⓒ 오마이뉴스 노순택

한편 이날 행사에 참가하기 위해 전남 여수에서 올라온 이승로 씨는 '독자의 바램'을 통해 "내가 새벽밥을 지어먹고 여기까지 올라온 세 가지 이유가 있다"며 "첫 번째는 나의 명예회복을 위해서이고, 두 번째는 이문열 씨에게 따끔한 소리를 하기 위해서이며, 마지막으로 그의 지역차별적 발언에 대해 해명받기 위해서이다"라고 말했다.

ⓒ 오마이뉴스 노순택
이씨는 "이문열 씨는 순수한 마음에서 시작한 나의 언론운동을 '홍위병'으로 매도해 내 명예를 훼손했으며, 끊임없이 '전라도민'를 차별하는 발언을 해왔다"며 "이 씨는 앞으로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발언을 해야 한다"고 밝혔다.

조성용 인사모 회장은 격려사를 통해 "우리가 하는 일은 세계 문화사에 유례가 없는 일이다"며 "그 이유는 우리가 세계사에 유례가 없는 한 문학인을 만났기 때문"이라고 비꼬기도 했다. 조씨는 또 "이 일을 계기로 이문열 씨는 본인이 공적으로 행한 언행에는 반드시 책임져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발언 순서가 모두 끝나자 <운동본부> 본부장 화덕헌 씨는 오후 3시경 "한국문학을 사랑하는 국민여러분께"라는 내용이 담긴 성명서를 낭독했다.

화덕헌 대표 "지식인의 위선과 교만이 깨어지기를…"

"...홍위병 발언은 교묘하게 변형된 색깔공세 입니다. 또한 홍위병 발언은 김대중 정권의 앞잡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특히 문학이 언론과 출판, 심지어 정치의 시녀가 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염려를 지울 수 없습니다. 심지어 소설을 사적 복숙심의 도구로 삼는 비열한 행위가 이문열 씨의 소설 작품 속에서 저질러지는 것을 보면서 독자로서 충격과 연민을 느끼게 됩니다...

▲ 관을 나르는 사람들의 표정에 슬픔은 간데 없고, 미소가 가득하다.
ⓒ 오마이뉴스 노순택
이문열돕기운동은 한 소설가의 왜곡된 정치 선동이 빚어낸 우리 시대의 우울한 자화상입니다... 이 운동을 계기로 이땅의 소위 지식인들의 위선과 교만이 깨어지기를 바랍니다. 스스로의 공적 발언에 대해 책임을 지는 겸허하고 진중한 역사의식을 갖게 되기를 바랍니다."(성명서 일부)

이날 집회에 참여한 사람들은 모든 행사를 마친 후 "대한민국 만세" "한국어 만세" "우리문학 만세"라고 만세삼창을 외쳤다.

행사를 마친 뒤 화덕헌 대표는 가지고 온 책을 반납하기 위해 부악문원 앞에서 "이 책을 받지 않겠다면 733권 모두를 단돈 10원을 받고 고물상에 팔겠다"고 외쳤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참가자들은 부악문원이 책 반납의 의사가 없다고 판단, 책을 모두 추스려 고물상으로 옮겼다.

<운동본부>의 회원으로 있는 김동균 씨는 "현재 유통되고 있는 화폐 중 가장 낮은 가격이 10원 짜리이기 때문에 단돈 10원을 받고 모두를 팔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한편 이날 행사에 참여한 한 독자는 "이런 독극물과 유해물질을 돈을 받고 고물상에 판다면 환경이 오염되기 때문에 우리가 만원을 주고 처리해달라고 하자"고 제안해 웃음을 자아내기도 했다.

"옛소! 책값 10원" 고물상 주인이 이문열 씨의 책 733권에 대한 가격을 치르고 있다.
ⓒ 오마이뉴스 노순택
이날 집회 내내 피켓을 들고 집회를 지켜본 민주참여네티즌연대 소속 한 회원은 "무엇 때문에 여기까지 왔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대해 "졌다, 졌어"라며 고개를 설래설래 저었다. 다시 그 의미를 묻자 최 모라고 자신을 밝히 그는 "사람들의 숫자를 비교해봐도 우리가 너무 적다"고 한숨을 쉬었다.

책을 10원에 판다는 말을 들은 민주참여네티즌연대의 다른 회원은 "20원 줄테니 우리에게 팔아라"라는 농담을 던지기도 했다.

이날 집회에 참여한 사람 중 가장 어린 참가자는 부모님, 누나 정하림(10), 형 정다운(8) 군과 가족이 모두 참석한 정우성(6) 군이었다. 가장 나이가 많은 사람은 서울에서 소식을 듣고 내려온 심병호(56) 씨였다.

당초 이날 행사에서는 '민주참여네티즌연대', '안티 DJ'등 단체 회원들과 <운동본부> 참가자들과의 마찰이 예상돼 경찰 병력이 배치됐으나 별다른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유골함에 담긴 '젊은날의 초상' 대한민국 문화권력 이문열과 '이문열돕기운동본부'의 한판 승부가 뜨겁다. 무엇이 진정 이문열을 돕는 길일까.
ⓒ 오마이뉴스 노순택



<운동본부> 배후에 전라도가 있다?

지난 7월 중순 이문열 씨의 '홍위병' 발언에 분노한 부산지역 독자들이 주축이 돼 만들어진 <운동본부>는 3개월 남짓되는 기간동안 이 씨가 작품을 발표한 책들을 모아왔다.

<운동본부>의 활동이 <오마이뉴스>를 비롯한 경향, 한겨레, 국제신문 등 언론사들을 통해 알려지자 전국에서 '책 반납'을 요청하는 100여 명 독자들의 책이 '운동'을 이끌어가고 있는 화덕헌 씨의 사진관으로 배달됐다.
▲"이문열 씨의 책들이 죽었습니다" 유골함에 넣어진 '사람의 아들'ⓒ오마이뉴스 김영균
이렇게 지난 11월 2일까지 모인 책은 모두 730권. 당초 목표한 1000권에는 못 미치지만, 독자들의 갖가지 사연과 분노를 담은 책들이 모여 <운동본부>는 "성공적"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한편 이문열 씨는 지난 10월 16일 부산에서 열린 '문학의 밤' 행사에 참석해 '<운동본부>=전라도'라는 주장을 늘어놓으며 지역감정을 부채질했다.

이날 이 씨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 "부산시민들에게 일러바칠 것이 있어 왔다"며 "현재 벌어지고 있는 <운동본부>의 화덕헌 씨는 전라도 사람일 것"이라고 주장했다.

화덕헌 씨는 "이문열 씨가 그 다음날인 17일, 해운대 그랜드호텔에서 만나 '전라도 사람 아니냐'고 물어와서 '대구가 고향'이라고 밝히자 '부모가 전라도 아니냐', '같이 활동하는 사람들이 전라도 아니냐'고 말했다"고 전했다.

한편 11월5일자 조선일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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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11월5일자 기사.
한편 조선일보도 3일 열린 이문열 씨 책반환 행사에 관련한 소식을 11월5일자 문화면에 실었다. 이문열 책반환' 장례식...한국 문학 '어두운 그림자' "국민작가의 책을 독극물이라니..."라는 제목으로 쓰여진 기사는 이문열돕기운동본부가 벌인 시위를 '전대미문의 문화적 참사'로 규정했다.

기사는 운동본부 측의 행동이 '지식인 테러'라고 우려하는 소리가 높다는 내용과 "폭력적인 구호를 사용하는 걸 볼 때 책을 반환하려는 (운동본부)사람들은 독자가 아닌 운동가들이라 생각한다"는 이문열 씨의 책 수령 거부 이유 등을 쓰고 있다.

"이 책들은 독극물이니 오히려 고물상에 만원을 주고 부탁하겠다"는 회사원 심병호 씨의 말도 그대로 인용되어 실렸다.

어린 여자아이가 이문열 씨의 작품으로 만든 영정을 들고 가는 장면을 찍은 함께 실린 사진설명은 '한 작가의 소설책을 관(棺)처럼 묶어 버젓이 장례식을 치른 이들에게 이날 영정을 들었던 어린 소녀는 십여 년 뒤 무엇이라 물을 것인가.'라고 쓰여졌다.

기사의 마지막에선 '한때 그들의 영혼을 살찌웠을 '국민작가'의 책은 이제 '독극물'이 됐다며, '이날따라 깊고 무심한 하늘엔 한국 문학의 장래를 절망케 하는 검은 만장(輓章)같은 징후가 떠돌고 있었'고 '피켓 든 자만 남고 펜과 붓을 쥔 자는 이땅을 떠날 것 같'았다고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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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오마이뉴스 입사 후 사회부, 정치부, 경제부, 편집부를 거쳐 정치팀장, 사회 2팀장으로 일했다. 지난 2006년 군 의료체계 문제점을 고발한 고 노충국 병장 사망 사건 연속 보도로 언론인권재단이 주는 언론인권상 본상, 인터넷기자협회 올해의 보도 대상 등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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