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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 추미애 의원의 취중 발언이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국민 4명 중 1명이 본다"는 조선일보와 온라인에서도 만만찮은 영향력을 자랑하는 디지털 조선에 상당시간 탑 기사로 보도됐기 때문에 추 의원의 실책에 대한 평가는 당분간 두고 두고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것 같다.

기자는 추 의원 행동의 정당성에 대한 시시비비보다는 다른 각도에서 이 문제를 다루고자 한다. 그것은 현재의 '빅3 신문 대 정권'의 탈세 공방과 뗄래야 뗄 수 없는 문제, 바로 취재원과 기자, 그리고 사주의 관계이다.

취재원이 자신을 다룬 기사에 불만을 터뜨리는 경우는 흔하다. 정정 보도를 요청하거나 극단적인 경우 정정 보도가 이뤄질 때까지 취재원이나 취재원의 측근이 언론사에서 '농성'을 벌이기도 한다. 그러나 조선과 김대중 정부의 갈등만 아니라면 이번 일은 정가에만 떠도는 해프닝으로 끝났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기자사회에만 회자됐던 이회창의 '창자론'

추 의원 해프닝은 이미 유명해진 또 다른 해프닝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1997년 여름 신한국당 대통령후보 경선 국면에서 한 유력 후보의 거친 입담이 잠시 화제가 된 적이 있다. 그러나 그 후보가 누구인지는 어떤 언론도 당시에는 밝히지 않았다.

당시 국민일보만이 같은 해 6월 25일자에 "모 후보가 '집권하면 그 사람들(반대파 지칭)의 창자를…이라는 발언을 했다'고 말했다는 소문이 떠돈다"고 아주 조심스럽게 보도했고, 경향신문이 다시 27일자 사설에 "신한국당 경선에서 '창자를 어찌한다'느니 하는 섬뜩한 얘기들이 나돌고 있는 것도 예삿일이 아니다"라고 지적한 바 있다.

나중에 경선에서 승리한, 발언 당사자 이회창 현 한나라당 총재는 7월의 어느 날 출입기자들과의 회식 자리에서 폭탄주가 몇 순배 돈 뒤 자기에게 불리한 기사를 쓴 두 명의 기자를 지목하며 "창자를 뽑아버리겠다", "씨를 말려버리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고 한다.

당시 동석했던 기자들이 "이 총재가 농담을 잘 못하는 성격인데, 당시 분위기로 농담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고 강변하지만, 대상자로 지목된 기자가 기분 나쁜 표정으로 자리를 나가 윗선에 직보했다는 것을 보니 과히 '기분 좋은 농담'은 아니었다는 느낌이다.

빅3 신문과 김대중 정부의 대립구도를 '언론 탄압 정국'이라고 규정하는 이 총재가 4년 전에는 '불리한 기사를 쓰면 창자를 뽑아버린다'는 끔찍한 농담을 했다는 사실이 과히 유쾌하게 들리지는 않는다.

이 총재가 이런 류의 농담을 즐기는 타입인지는 모르지만, 총선 유세중이었던 작년 4월 4일 제주시청 앞 정당연설회에서는 "나라를 생각하지 않는 이 정권을 도끼로 내려찍자"는 '화끈한 발언'으로 이목을 끈 바 있다. 이 총재의 '도끼' 발언은 공개석상에서 이뤄져 비보도가 불가했음인지 사람들에게도 제법 알려져 '법대로'만이 아닌 '기개'도 있음을 보여줬다.

문제는 이 총재의 '창자' 발언이 기자사회에만 돌다가 3년이 지난 2000년에야 공식적으로 확인되었다는 것이다. 이른바 '창자' 발언은 장차 일국의 지도자가 될 사람의 입에서 나왔다고 하기에는 너무나 섬뜩한 표현이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독도 영유권 문제와 관련, 95년 11월 14일 일본에 대해 "버르장머리를 고쳐놓겠다"고 언급해 한일간의 외교문제로까지 비화되기도 했다. '버르장머리' 운운은 민족적인 카타르시스는 주었을지언정 정권이 바뀌기 전 대일 관계가 회복되기 어려운 지경까지 악화되는, 외교적 실익을 초래했다.

사주의 입맛에 맞추는 조선의 이중 잣대

다시 추 의원의 취중 발언으로 돌아가자. 97년 이 총재의 '창자' 발언은 농담으로 받아넘겨 기사화하지 않고, 추 의원의 발언에 대해서는 누구 누구를 거론했다는 사실까지 구체적으로 밝힌 조선일보의 보도 기준은 무엇이겠는가.

그 차이는 97년의 이 총재는 족벌 언론들이 '영구히 친선관계를 유지'해야 할 여당의 대선 후보였고, 지금의 추 의원은 내년에 어떻게든 무너뜨려야 할 여당 의원이라는 것이다.

97년까지 여당 대선 후보가 한번도 대선에서 패한 적이 없는 상황에서 언론사들은 행여나 이회창 당시 대선후보의 득표에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었던 '창자' 발언을 깔아뭉갰던 게 아닌가? 그리고 지금 추 의원은 정권과의 물러설 수 없는 대결에서 어떻게든 거꾸러뜨려야 할 여당의 공격수가 아닌가?

사주의 특정 정치세력에 대한 친소관계로밖에는, 조선일보가 자신의 품위마저 손상시킬 것을 감수하면서까지 굳이 특정 의원의 막말을 기사화한 의도를 설명할 수 없을 것 같다.

더더군다나 추의원의 취중 추태는 진형구 전 대검 공안부장의 '조폐공사 파업유도 발언'이나 서석재 전 총무처 장관의 '전직 대통령 비자금 계좌 발언'처럼 국민의 알 권리와 직결되는 내용이 아니었다. 수백만 열혈 독자들 앞에서 일방적으로 '망신'을 당하고 나서 술기운에 욕을 퍼부은 것이 그렇게도 비난을 받아야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만약 조선일보 글쟁이들의 대표인 김대중 주필이 97년 15대 대통령 선거를 이틀 앞둔 12월 16일 밤 술기운에 국민신당 당원들에게 "너네들, 내일모레면 끝이야. 국민회의·국민신당 너희는 싹 죽어, 까불지 마!"라고 했던 것을 당시 신문들이 대대적으로 보도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기자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입법기관으로서의 존엄성을 부여받는다는 국회의원의 운신이 사주와 이해를 같이 하는 한 기자의 펜대와 그 기사에 타이틀을 달아주고 가치를 부여하는 편집진의 잣대에 의해 천당과 지옥을 오르락내리는 현실에 참담함을 느낀다.

조선일보 기자들은 지난달 27일 채택한 성명서에서 "권력은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을 이루기 위해 신문사를 없애버릴 수도 있다는 오만까지 드러내 보이고 있다"고 말했다. 그 말에서 기자는 거꾸로 "사주에 대한 법의 심판을 피하기 위해 정권을 없애버릴 수도 있다"는 조선일보의 오만을 읽는다.

조선일보는 "정권은 유한해도 거대언론을 사유화한 사주의 영화는 영원하다"고 굳게 믿는 듯하다. 기자는 독재정권들의 특혜 속에 성장한 언론권력이 역대 정권 중 최약의 전력으로 감히 언론에 도전한 정권을 흔드는, 슬픈 현실을 본다.

요즘 들어 우리는 토머스 제퍼슨의 유명한 격언(신문이 없는 정부와 정부가 없는 신문 중 하나를 택하라고 하면 나는 정부 없는 신문을 택하겠다)을 부쩍 자주 접하게 된다. 그러나 그 앞에 붙은 말은 보통 무시되고 있다. 제퍼슨은 그 격언에 앞서 "정부는 민의에 기초하고 있으며 정부의 지상 목표는 민권을 유지하는 데 있다"고 말했다.

'정부보다 더 소중한 우리의 신문'은 지금 국민의 뜻과 사주의 뜻 중 어느 쪽에 더 가까운가?

덧붙이는 글 | 기사 중 이회창 창자론에 대한 부분은 월간 말 2000년도 7월호 기사(www.digitalmal.com/article_final.asp?ex_category=1&ex_part=&page=1&parent_file=search.asp&ex_code=0000000266)를 참조했습니다. 말지의 좋은 기사에 감사드립니다. 자신의 정치적 색깔을 드러낸다는 것은 역시 쉽지 않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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