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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에 제보된 어머니의 편지

지난 2월 12일 <오마이뉴스>에 한 편의 편지가 제보됐다. 여군 장교를 딸로 둔 어머니의 편지였다. 어머니는 자신의 딸 이아무개 중위가 사단장으로부터 당한 성추행과 그 이후의 긴 후유증을 편지에 상세히 적었다.

ⓒ 오마이뉴스 자료사진
지난 1월 8일 육군은 전방부대 현역 사단장 김아무개 소장이 부하 여군장교를 성추행한 혐의가 드러나 보직해임시켰다고 밝혔다. 김 소장은 1월 15일 육군 징계위에서 정직 3개월이라는 가벼운 조치를 받았다. 언론에 보도된 그의 '혐의'는 대체로 "회식도중 술을 따르는 여군 소위의 엉덩이를 만졌으며 회식이 끝난 뒤 사단장 공관으로 따로 불러 입을 맞추려는 등 주로 사단장 집무실과 공관에서 지난 6월 초까지 모두 9-10차례 성추행한 혐의다"(한겨레 1.9)라는 정도였다.

그러나 이 '어머니의 편지'는 크게 다음 네 가지를 보여준다.

1) 사단장의 성추행은 언론에 보도된 것보다 훨씬 심각했다. 직위를 이용한 계획된 것들이었으며 장기간 반복된 것이었다.
2) 성추행을 당한 여군은 심각한 후유증을 앓고 있으며 '자살'을 생각했을 정도다.
3) 군당국은 이 성추행 사건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거나 축소시켰으며 가해 사령관을 파면하기보다는 보직해임-정직 3개월이라는 가벼운 징계를 내렸다.
4) 가해 장군은 구명운동을 벌이고 있으며, 피해 여군은 '정신병 환자이며 행실이 문란하다'는 소문에 시달리고 있다.

<오마이뉴스>는 피해자 주변 관련인사들을 취재했다. 그리고 편지에 실린 내용은 대부분 사실로 인정할 만한 증언들을 바탕으로 한 것임을 확인했다.

그러나 가해자 김 소장은 "연약한 여군 소위가 전방부대 생활에 적응하기 힘들어 해 격려 차원에서 관심을 가졌다"며 구체적인 신체접촉 사실을 완강히 부인한 것으로 알려졌다.(한겨레 1.9) 김 소장은 여전히 장군의 신분으로 '정직 3개월' 후의 복귀를 위해 요로에 구명운동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피해자 이중위의 어머니 송아무개 씨는 "사건은 해결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송씨는 "주위의 압력으로 사건이 상당 부분 축소되었고 정직 기간 동안 가해자가 자신의 구명운동을 벌이고 있다"며 "지금 부대에는 내가 돈이 필요해 이 일을 꾸몄으며 내 딸이 정신병 전력이 있고 평소 행실이 문란했다는 소문까지 퍼지고 있다"고 억울함을 호소하고 있다.

송씨는 2월 13일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내가 원하는 것은 진상이 밝혀져 딸이 명예롭게 제대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이런 어머니의 호소에 현역-예비역 여군들도 움직이고 있다. 이들은 지난 7일 한국성폭력 상담소의 인터넷 사이트(www.sisters.or.kr)에 설치된 군대 성폭력 토론방에 '현역·예비역 여군들의 입장'이라는 글을 통해 "이중위의 성희롱 사건과 관련 여러 여성단체와 연대해 피해자 이중위의 명예회복과 가해 사단장의 전역 및 강력한 군내 성희롱 방지대책 마련을 촉구하는 운동을 벌여나가겠다"고 밝혔다.

이 모임을 주도하고 있는 한 예비역 장교는 "상하위계질서가 중시되고 명령복종관계가 명확한 군 조직내에서는 성희롱이 발생하더라도 피해자가 군인신분으로 불이익을 감수하면서까지 이 사실을 고소하기는 매우 어렵다"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일을 통해 군대 내 성희롱 문제가 표면으로 드러난 만큼 이 사건이 이중위 개인의 문제로만 치부되어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여군중위 성추행 혐의 사단장 반론인터뷰 "성추행한 적 없다, 억울하다. 내가 피해자...항고하겠다"

다음은 어머니 편지의 요약(원본의 약 2분의 1)이다.

가슴이 미어터질 것 같은 이 심정

저는 이** 여군중위의 어미되는 사람입니다.
그간 사단장이 성희롱으로 보직해임됐다면서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었던 제 딸이 겪은, 아니 지금도 끝나지 않은 그간의 일들에 대해 군인이라는 신분 때문에 끊임없이 침묵하고 고통을 감수해야 하는 제 딸을 옆에서 1년여 동안 지켜보면서 느끼고 지금도 가슴이 미어 터질 것 같은 이 심정을 누군가에게는 말해야 할 것 같아 이렇게 두서없이 보고 느낀 것을 말하려 합니다.

제 딸이 1999년 10월 22일 전방사단 부관부에 실무장교로 보직받고, 한달도 채 안되어서 바로 그 문제 사단장이 같은 부대 사단장으로 부임한 그 해 11월 9일부터 제 딸의 인생은 저희들의 기대와 다르게 나아가기 시작했습니다.

사단장은 보직받은 직후 있은 부서 초도 업무보고 때부터 부관참모와 같은 사무실 직원들이 다 있는 자리에서 업무보고를 받고 나가는 문 앞에서 제 딸의 볼을 꼬집는 행태를 보였답니다. 그 순간 제 딸은 기도 막히고 황당하기도 해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도 몰랐고 주변 사람들은 그런 딸에게 '아버지가 딸이 예뻐서 하는 행동'쯤으로 받아들였답니다.

그러나 11월 28일 부대 연말송년회식이라고 하는 참모들과 내외귀빈들이 모인 행사장에서 그 행동이 결코 단순한 '아버지의 정'이 아니라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사회를 보던 부관참모는 손짓으로 제 딸을 불러 사단장에게 한 잔 따르라고 지시했고, 지시에 복종하는 법만 배운 우직한 제 딸은 긴장된 손으로 배운 의전대로 사단장의 왼편에 서서 술을 따라야 했습니다. 술을 따르는 그 순간 주변이 소란스런 가운데 제 딸은 어찌할 바를 모르는 상태에서 사단장의 손이 제 딸의 허벅지와 엉덩이에 와 닿았고 사단장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말하기를 '회식 끝나면 공관에 와서 차 한잔하라'고 지시했습니다.

저녁 8시경 회식이 끝난 제 딸은 공관이 어디에 있으며 그곳이 도대체 무슨 장소인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운전병이 이끄는 대로 공관에 가야 했습니다.

사단장이 '거실은 당번병들이 내일을 위해 업무를 해야 하니 찻잔을 들고 사단장의 개인공간인 내실로 옮기자'며 먼저 일어섰습니다. 영문을 모르는 제 딸은 덩달아 엉거주춤 일어나야 했고 불안하면서도 어찌할 바를 모른 채 한 손엔 모자와 가방까지 들고 따라 들어갔습니다.

그때 거실에서 사단장을 찾는 전화가 울렸고 일어나 내실을 나가려던 사단장은 갑자기 앉아 있는 제 딸의 앞에 서서 얼굴을 두 손으로 움켜안더니, 입을 맞추는데 제 딸은 그 순간을 이야기할 때면 지금도 몸서릴 칩니다. 사단장 입이 제 딸의 입에 닿는 순간 사단장의 혀가 느껴졌고 제 딸은 그 순간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못 느낄 정도로 황당했으며, 사단장이 나간 다음에는 충격과 두려움으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답니다.

전속부관의 도움 받아 '탈출'은 했지만

사단장이 나간 잠깐 틈에 전속부관이 들어와 '무슨 일 있었니?'라고 물었고, 눈물을 흘리는 제 딸을 보고 부관이 '내가 알아서 처리해 주겠다'고 말하며 나갔답니다. 거실에서 내실로 들어 온 사단장이 또 딸을 잡고 껴안으며 입맞춤을 하려는데 딸의 핸드폰이 울렸고 황급히 사단장을 뿌리치고 핸드폰을 든 딸에게 부관은 '아빠가 널 보러 지금 온다고 그래라'라는 행동요령을 알려주었답니다.

제 딸은 부관의 두 번째 핸드폰전화를 받고서야 아버지가 관사에서 열쇠가 없어 기다린다는 말을 하고 가까스로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답니다.

일어나 나가는 순간에도 사단장은 익산한방병원에서 가져온 건강식품을 아버지에게 가져다 주라며 잠깐 기다리라는 지시를 하고 2-3분 기다리는 사이에 다시 또 딸에게 그 지겨운 입맞춤을 한 후에야 제 딸을 공관에서 놓아주었다고 합니다.

그 후에도 계속되는 강제 키스

(아프다는 핑계로 휴가를 얻어 충격을 추스린 후) 부대로 복귀한 제 딸은 참모의 지시에 의해 다시 사단장의 집무실에 들어가야 했습니다. 두려움에 떨며 들어간 제 딸에게 사단장은 '집에 무슨 일 있었느냐, 핸드폰을 잃어버려 연락이 안됐다는데 핸드폰을 사라'며 제 딸에게 30만원을 주었고 나오는 제 딸 곁으로 와서는 다시 얼굴을 움켜쥐고 입을 맞추는 행동을 반복했더랍니다.

사단장 방에서 나온 제 딸은 부관에게 30만원을 돌려주었고 (부관에게 모든 사실을 말했고 부관이 다른 장군에게 이런 사실을 다 말하겠다고 했으니) 곧 조치가 있겠지 하는 실낱 같은 희망으로 하루하루를 사단장이 또 부르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속에서 누구에게 말도 못하고 수치심에 죽고싶은 심정으로 견뎌야 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7월 14일 사단을 떠나는 날까지 6개월 동안 사단장은 웬만해선 사단장과 마주치지 않으려 하고 얼굴을 대할 일도 없는 제 딸을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집무실과 공관으로 불렀다고 합니다.

여성단체를 비롯한 인권사회단체들는 군대내 계급을 이용한 성추행과 폭력사건이 알려진 것보다 매우 심각할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자료사진
우선 어느 사단이나 부관참모가 사단장의 친명을 받아서 직접 처리하고 직접 보고하게 되어 있는 특별한 관계에 있는 휘하 병력의 신상에 대한 보고를 '그런 사소한 일은 이중위에게 맡겨라'라고 지시해서 부관참모의 지시에 의해 강제로 사단장 집무실에 보고를 들어가야 했고 피하다 피하다 우연히 복도에서 마주치면 '내 방으로 차 한 잔 하러 와라'라는 지시로 불러 들어가야 했으며 그 때마다 어김없이 피하는 제 딸을 잡고 무릎에 강제로 앉히고 손으로 얼굴을 가리는데도 입맞춤을 하며 제 딸을 9-10차례나 괴롭혔습니다.

심지어는 제 딸이 드디어 군단으로 전출가는 날 사무실 회식을 하는데도 참모편에 지시해서 회식 20분만에 밥만 먹고 일어나 직할대 군악대장과 여군중사들이 주인공인 공관회식에 참석하도록 시켰습니다. 그 마지막 회식에서도 사단장은 어김없이 제 딸과 함께 회식에 참석하던 갓 전입 온 여군중사의 허벅지와 엉덩이를 만지는 추태를 보였고 역시 언제나처럼 그를 본 누구도 말리거나 도와주는 사람은 없었고 그 분위기를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들였습니다.

저는 딸의 이야기를 알고는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더군요. 그러나 제 딸이 말하기를 '엄마, 사단장이 얼마나 높은지 알아?' 제 딸의 이야기를 듣고 잘못 하다가는 제 딸이 쥐도 새도 모르게 안전사고로 위장되어 죽을 수도 있다는 불안감에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저는 몇 번이나 까무러칠 정도로 몸서리를 쳤습니다.

심지어는 생전가야 힘들다는 말을 안하는 제 딸이 어느 날 집에 전화해 제게 하는 말이 '어떤 상황이냐?' '또 불렀냐?' 그러면 제 딸이 '엄마, 사단장이 나를 자꾸 불러 안어...'하며 통곡하는 소릴 듣고 제가 또 까무러치고 하는 악순환이었습니다. 명랑하던 저의 딸은 외박나온 그 날만 반짝 생기가 돌고 그 다음날부터는 돌아갈 생각에 경기를 일으키며 밖에도 안 나가고 오로지 집에서 엄마 외에 말도 안하고 끙끙 앓는 것이었습니다.

긴 후유증 -- 대인기피증

그렇게 죽고 싶은 시간들임에도 세월은 흘러 군단 부관부로 제 딸은 옮겨왔고 상황은 나아질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제 딸은 안으로 곪을 대로 곪아 정상인이 아니었습니다. 군단에 와서 반갑게도 제 딸은 군단전속부관의 프로포즈를 받아 건전한 만남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군단부관을 알면 알수록 제 딸은 자기와 비교했을 때 군단부관은 군단장을 진심으로 존경하고 군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본인의 군생활을 즐기는데 비해 자신의 모습이 초라하기 그지없다는 것을 깨달았답니다.

우선 제 딸은 아무 이유없이 군단장이 무조건 싫었고 얼굴을 마주칠까봐 벌벌 떨 정도로 두려움의 대상이었으며, 참모는 물론 보좌관이나 계급이 제 딸보다 높은 사람이면 무조건 피하고 싶었고 심지어는 처부 회식자리도 두려움에 피하거나 술 한잔 안마시고 빨리 일어나는 데다가 참모나 주변 동료가 차 태워 준다는 걸 극구 거절하고 그 길고 추운 밤길을 혼자 걸어서 집으로 오는 등 현저한 대인기피증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심지어는 휴가중에도 집과 목욕탕 외에는 움직이지 못했고 혹시 사람들이 팔이라도 잡고 친밀감을 표시하면 혹시 내 일을 아나 싶어서 부끄러움과 수치스러움에 죽고 싶었고 나중에는 에미 되는 저 외에는 그 누구와도 말하기가 싫어 죽고 싶어했습니다.

10월부터는 직장에 다니던 동생마저 회사를 그만두고 농사짓던 저와 번갈아가며 제 딸과 함께 있어주어야 할 정도로 상황은 심각했습니다.

12월 말에는 결국 보다 못한 제가 딸을 잡고 '우리 같이 죽자, 너 이렇게 살려면 같이 죽자...'라며 두 모녀가 붙들고 통곡했고 차라리 해코지를 당해 죽더라도 검찰에 고소하자라는 생각을 그때서야 했습니다.

고소, 그리고 회유

고소하면서도 사단장 옷을 벗길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고 오로지 제 딸이 이렇게 살다가 딸이 폐인되거나 자살하느니 억울함을 호소하면 군에서 제대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지요. 이미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할 정도로 제 딸은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었으니까요. 아무도 도와주는 사람은커녕 말할 사람도 없었고요.

이런 딸의 행동이 정상이 아니라고 생각한 군단 부관이 제 딸에게 그 이유를 물어 결국 알게 되고, 전 사단전속부관과 친분이 있었으므로 군단부관이 접촉한 결과 제 딸이 결백하고 사단장이 얼마나 파렴치한 인간인가를 확실히 인지하였고 자신이 신뢰했던 군단장이 옳은 판결을 내려 줄 것이라 믿고 검찰에 고소하도록 제 딸을 격려했습니다.

그래서 12월 28일 제 딸이 용기를 내어 군단 검찰부를 방문해서 고소의사를 밝혔고 그날밤 당직근무를 서면서 밤새 고소장을 작성한 제 딸은 다음 날 12월 29일 아침 근무취침 시간을 이용해 9시 30분에 군단검찰부에 찾아가 고소장을 접수시키고 오전 내 서류를 작성한고 12시 40분에야 도장을 찍었습니다.

그리고 사단장이 보직해임되는 1월 8일까지 저희 부부와 제 딸이 사단장과 사단 참모들로부터 겪은 압력과 회유과 협박은 이루 말로 다할 수가 없습니다.

최후 진술, "30년 썩은 별 하나 아까워하지 마시고..."

1월 15일 육군본부에서 참모차장 주관으로 징계위원회가 열렸고(고소는 군 고위관계자의 설득으로 취하한 상태였음--편집자) 이 자리에서 제 딸과 사단장은 다시 그 지겨운 대질심문을 펼쳤습니다.

제 딸이 보는 자리에서도 사단장은 계속 거짓말을 했고 징계위원들은 제 딸의 과거 행적과 정신병력, 집안 환경까지 물으며 마음을 아프게 했으며, 사단장은 '존경하는 선후배님께'라는 미리 준비된 유인물을 뿌려 법무감과 검찰관들이 일방적으로 제 딸의 편을 든다는 터무니 없는 말까지 써 검찰관들을 분노케 하는 등 많은 해프닝들이 벌어졌습니다.

저는 그 날 비로소 그때까지는 하늘 같이 보였던 군의 별들이 그렇게 하찮을 수도 있다는 것을 처음 깨달았습니다. 제 마음이 이러니 제 딸은 오죽하겠습니까.

그런 제 딸이 그 날 징계위원회장에서 위원들에게 이렇게 최후 진술을 했습니다.

'위원님들, 30년 썪은 별 하나 아까워 하지 마시고 전후방에서 피어나는 어린 새싹 같은 젊은 장교들을 보십시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날 징계위원회 결과는 검찰에서 요구한 파면이 아닌 정직 3개월이라는 예상치 못했던 결과였습니다.

그때까지 검찰이나 주변에서는 당연히 사단장은 파면으로 군복을 벗어야 하고 벗을 것이라고 들었는데, 그 날 결과는 결국 사단장에게 정직 3개월이라는 판정으로 한 단계 경감하면서, 3개월이 지나면 다시 현역복무부적합심의원회라는 과정에서 군생활에 대한 판정을 다시 내린다고 하니, 아직도 사단장에게 다시 군 생활을 할 수도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자 하는 높은 분들의 심리를 도대체 알 수가 없습니다.

지옥같은 연장전 - 내 딸을 구해 주십시오

언론에는 마치 보직해임이나 정직 3개월의 조치가 과중한 처벌인 양 보도되었고 그 처벌이 이루어지는 과정의 부당함이나 사단장이 조금도 죄를 뉘우치지 않는 상황, 그리고 제 딸이 처한 열악한 환경 같은 것은 조금도 보도되지 않았습니다. 정직 3개월간 사단장이 무슨 일을 할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임에도 말입니다.

그리고 지금 사단장은 정직 3개월이라는 기간을 이용해 이리저리 다니면서 구명운동을 펼치고 있고, 그 여파인지 몰라도 군 여기저기서는 제 딸의 행실이 나쁘고 사단전속부관이나 군단전속부관과 성관계를 맺어 임신중인데 아버지가 누군지 모른다는 등의 말까지 나돌고 있습니다.

제 딸은 이제 여군학교에서 군생활을 1년여 남겨두고 있습니다. 여군학교, 그나마 여군들의 집단이라 다행이라 생각하지만 제 딸은 이제 그 정도도 견디기에 너무나 지쳐 있고 상처가 큽니다.

제 딸은 지금이라도 정상적인 경로가 있다면 군에서 나가기를 바라며, 아니 군에서 나가지 못하더라도 제발 병원에 입원해서 사람들을 만나지 않고 지금까지 받은 상처를 치료하기를 원합니다.

제 딸이 어떻게 해야 다시 옛날의 그 똑똑하고 밝고 성실하고 야무진 **가 될수 있을까요. 제발 제 딸을 도와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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