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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당 서정주가 24일 삶을 마감했다. 미당은 누가 뭐래도 한국 최대의 시인으로 칭송받고 있다. 일제시절의 반민족행위에 대해서도 가끔 지적이 있었지만 그는 흔들리지 않고 정상의 자리를 지켜왔다. 그가 죽었음에도 영향력은 상당할 것으로 보인다.

대부분의 언론(인터넷)에서는 미당의 사망과 관련하여 "미당 서정주 시인 별세(연합뉴스, 한겨레, 중앙일보)", "미당 서정주 시인 타계(조선일보)", "미당 서정주 시인 동천(冬天)으로 떠나다(동아일보)", "[未堂 서정주시인] 전통가치 한국적 美學으로 승화(매일경제)", "타계 서정주시인 누구(대한매일)" 등의 제목으로 기사를 실었다. 그 기사들에는 미당에 대한 존경의 뜻과 안타까움이 담겨 있었다. 존경과 안타까움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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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결코 미당을 존경하지 않는다. 그래서 '별세'니, '타계'니 하는 어렵고, 고상한 말보다 '사망', '죽음'이란 말을 쓰련다. 사람이 죽은 마당에 뭘 그렇게 지나간 일을 갖고 그러냐고 묻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미리 답한다. 반민족, 반민중적 행위를 한 사람은 그가 살았건 죽었건 단죄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제2, 제3의 반민족 행위자들과 그 후손들이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기념사업이다 뭐다 하며 끊임없이 역사를 왜곡하고, 역사의 시계를 거꾸로 돌리려 책동할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미당의 죽음 앞에서 안타까움을 느낀다. 미당의 반민족, 반민중 행위에 대한 심판이 생전에 온전히 이뤄지지 못하였고, 서정주가 자신의 죄를 스스로 참회하지 않고 죽은 것이 안타깝다는 말이다.

미당은 생전에 자신을 친일파라 비판하는 것에 대해 자신의 친일 행위를 인정하면서도 특유의 '시적 논리'로 "일본이 그렇게 쉽게 항복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못 가도 몇 백 년은 갈 줄 알았다"고 변명하였다. 더 나아가 미당은 친일 반민족행위에 대해 "'이것은 하늘이 이 겨레에게 주는 팔자다' 하는 것을 어떻게 해서라도 익히며 살아가려 했던 것"이라며, 자신은 친일파가 아니라, "종천순일파(從天順日派)"라 했다. 친일행위가 하늘의 뜻이라는 말이다. 미당의 이런 변명에는 일본이 너무 쉽게 항복한 것을 못내 아쉬워하는 마음이 깊게 남아 있다고 보는 것은 나만의 억측일까.

여기에 서정주(창씨명 다츠시로 시즈오達城靜雄)의 친일 시 <오장(伍長) 마쓰이 송가(頌歌)>(1944년 발표) 중 일부를 적어 본다.

우리의 동포들이 밤과 낮으로
정성껏 만들어 보낸 비행기 한 채에
그대, 몸을 실어 날았다간 내리는 곳
소리 있이 벌이는 고흔 꽃처럼
오히려 기쁜 몸짓 하며 내리는 곳
쪼각쪼각 부서지는 산더미 같은 미국 군함!

수백 척의 비행기와
대포와 폭발탄과
머리털이 샛노란 벌레 같은 병정을 싣고
우리의 땅과 목숨을 뺏으러 온
원수 영미의 항공모함을
그대
몸뚱이로 내려쳐서 깨었는가?
깨뜨리며 깨뜨리며 자네도 깨졌는가―

장하도다
우리의 육군항공 오장 마쓰이 히데오여
너로 하여 향기로운 삼천리의 산천이여
한결 더 짙푸르른 우리의 하늘이여


대단한 선동력을 갖고 있다. 이 얼마나 정치적인 시인가?

서정주는 1942년부터 1944년 사이에 집중적으로 정치적인 친일 작품들을 발표했다. 대표적인 것 몇 가지를 꼽아 본다.

<시의 이야기-국민 시가에 대하여(1942, 평론)> <징병 적령기의 아들을 둔 조선의 어머니에게(1943, 수필)> <인보의 정신(1943,수필)> <스무 살 된 벗에게(1943, 수필)> <항공일에(1943, 일본어시)> <최체부의 군속 지망(1943, 소설)> <헌시(1943, 시)> <보도행(1943, 수필)> <무제(1944, 시)>

미당은 이처럼 일제침략 시기엔 '영미 제국주의'에 반대하여 싸우자거나 황국신민화를 찬양하는 내용의 정치시(수필)를 써왔는데, 해방 후에는 어느 새 친미파로 변신하여 <이승만 박사전>이란 책으로 이승만 개인에 대한 선전에 힘썼고, 1948년 정부가 수립되자 초대 문교부 예술과장 자리에 앉았다.

그런 미당에게 이른바 '순수 시단'을 대표하는 한국 최고의 시인이란 칭송이 따라붙고 있다. 참으로 한심한 일이다. 아니 '순수'의 이름으로 얼마나 사람들을 속이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일이다.

어디 그뿐이던가. 서정주는 1966년 광복절을 맞아 <다시 비정의 산하에>라는 시를 발표했다. 다음은 그 일부.

새로 나갈 길은
하늘에서도 땅에서도
베트남뿐이다
베트남뿐이다


'순수 시인'의 반민족, 반민중적 현실 참여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지난 1981년엔 광주민중들을 학살하고 권좌에 오른 전두환 후보를 지원하기 위한 텔레비젼 연설을 하였고, 그 공로가 인정되어 5공화국 때는 국보위 위원이란 자리에 앉았다. 또한 광주민중항쟁 이후 불의한 현실에 항거하며 활동했던 '민중문학'에 맞서기 위해 1986년엔 [문학정신]을 만들어 사상논쟁을 불러일으키면서 보수우익세력을 대변하였다.

또한 우리나라 민주화 운동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던 6월 항쟁이 있었던 1987년 초여름엔 그가 회장으로 있던 '한국문인협회'라는 단체에서는 전두환의 '4.13 호언조치'를 위대한 구국의 결단이라고 지지하는 성명을 내서 국민들의 분노를 산 바 있다.

하지만 놀랍게도 서정주는 여전히 한국 문학계의 '순수 시단'을 대표하고 있다. 물론 정감 있는 토속어로 시를 쓴 미당의 시 쓰는 능력은 인정한다. 하지만 그 문학적 재주가 반민족, 반민중 행위에 대한 면책 사유는 될 수는 없다.

하루 빨리 미당을 비롯한 반민족행위자들에 대한 온전한 역사적 심판이 이뤄지길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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