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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지난 9일 저녁에 성당에 다니는 남성들 가운데 같은 지역에 사는 교우들이 모임을 가졌습니다. 매달 교우들의 집을 돌아가면서 모임을 갖는데, 부부간의 화합이 얼마나 잘 되는지 남성모임임에도 불구하고 아내와 함께 나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나도 약속된 시간에 아내를 데리고 정해진 모임 장소로 갔습니다. 몇 명이 이미 먼저 와서 우리 부부를 반갑게 맞이했습니다. 그 집 부인은 벌써 몇몇 여자 교우들과 함께 맛있는 음식을 만들고 있었습니다.

신발을 벗고 들어가려고 하는데 거실 한 구석에 많은 글자가 적힌 액자 하나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봤더니 ‘부부 십계명’이란 제목 아래 열 가지 부부의 덕목이 적혀져 있었습니다.

다른 곳에서 몇 번 같은 제목의 글을 보았기에 대수롭지 않은 내용이려니 했는데, 첫 번째 계명이 나를 그만 꼼짝 못하게 만들고 말았습니다. 마치 나를 보고 소리 없이 엄하게 꾸짖는 것 같아 몇 번이나 그것을 보았습니다.

거기에 적힌 ‘부부 십계명’의 첫 번째 항목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남편은 밖에서 불편하던 얼굴로 집안 식구를 대하지 말라’

모임은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거의 두 시간 가량 잘 진행되었습니다. 나도 회장의 지시에 따라 책도 잘 읽고, 다른 교우들과 사회 돌아가는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하지만 내 머릿속은, 올해 초에 있었던 가슴 아픈 일이 자꾸만 그 집에 걸려 있는 ‘부부 십계명’과 함께 떠올랐습니다.

이 땅의 가장들은 다 마찬가지이겠지만, 나도 직장생활을 하면서 힘들고 괴로운 적이 많았습니다. 지금도 즐겁고 보람을 느끼는 경우도 적지 않지만, 그와 반대로 마음과 몸이 몹시 고통스러울 때도 때때로 있습니다.

새해가 시작되는 올 초는 다른 해보다도 유난히 직장에서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워낙 성격이 소심하고 내성적인지라 나에게 닥친 그 과정을 쉽게 이겨내지 못하고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상황이 심각했던지, 직장을 그만두어야겠다는 생각까지 할 정도였습니다. 밤만 되면 그렇게 잠을 잘 잤던 내가 신경을 바짝 써서 그런지 도통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거의 한 달가량을 제대로 잠도 못 잔 상태에서 직장에 나갔으니 몸도 마음도 완전히 엉망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도 식구들에게 절대로 말하지 않으리라 마음먹었습니다. 아버지께도, 아내에게도, 그리고 두 아이에게도 직장 문제로 고통을 겪고 있는 나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리라 결심했습니다. 힘들지만 식구들에게 직장 생활을 재미있게 잘하고 있는 것처럼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일은 내가 바라는 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내가 아무리 감추려고 해도 아내의 눈을 피할 수가 없었습니다. 몇 번이나 무슨 일이냐고 물어봤습니다. 말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나중엔 귀찮아서 큰소리로 짜증을 내기도 했습니다.

가장은 밖에서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집에 들어와서는 그것을 다 감추고 편안한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난 그만 식구들에게 들켰고 몇 번이나 그들을 불안하게 만들고야 말았습니다.

아내는 남편으로부터 싫은 소리를 숱하게 들어가면서도, 내가 조금 안색이 나아지면 같이 이야기를 나누자고 했습니다. 뭔지 자세히 모르지만, 비록 해결은 안 되더라도 머리를 맞대고 대화를 하다보면 답답한 마음은 풀리지 않겠느냐고 내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말을 했습니다.

나의 큰소리로 말미암아 아버지와 두 이이의 얼굴에 어둠이 드리워졌습니다. 아들이 직장을 그만둔다면, 아빠가 직장에서 나온다면 어떻게 생활해야 하는가에 대한 식구들의 불안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더욱 심해졌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누구보다도 가장 힘들고 괴로운 사람은 아내였을 것입니다. 말하지 않고 끝까지 숨기려고 하는 나를 인내심을 갖고 설득하여 마침내 입을 떼게 만들었습니다.

아내는 아버지와 두 아이에게 나의 어려움을 다 말했습니다. 그리고 식구들이 이럴 때에 큰 힘이 되어주어야 한다며,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에 대해 즉석 가족회의를 열었습니다.

내가 집에 와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얼굴색도 변하지 않고 자신감 넘치는 모습으로 식구들을 대했으면 아무도 몰랐을 텐데, 그렇게 하지를 못해 나의 힘듦을 식구 모두가 알게 된 것입니다. 나의 아픔이 이제는 식구 모두의 아픔이 되고야 말았습니다.

그 자리에서 여러 방안이 나왔습니다. 아내도 말하고, 아들과 딸도 한 마디씩 나를 향해 말했습니다. 모두가 수긍할 만한 현실적인 답은 나오지 않았지만, 이 못난 남편과 아빠를 위해 힘을 북돋워주려는 마음이 너무 고마워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올 뻔했습니다.

식구 모두의 걱정과 격려 때문인지, 아니면 상처가 아물 만큼 지났기 때문인지 알 수 없지만, 그 이후 한 달간 지속된 불면증에서 벗어나 다시 힘을 얻고 직장생활을 열심히 하게 되었습니다.

이 일을 겪으면서 난 이 땅에서 가장으로 살아가는 것에 대해 많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가족 모두의 생계를 짊어진 가장은 그 어떤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이겨내야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직장에서의 고통을 이를 악물고라도 집에 와서는 내색하지 않아야 된다는 것도 깨달았습니다.

난 그것을 하지 못했습니다. 처음엔 노력을 했지만 끝까지 이겨내지를 못했습니다. 나약한 가장의 모습만을 식구에게 보여주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마음을 매우 불안하게 만들고야 말았습니다. 그것도 거의 한 달가량을 식구에게 그런 고통을 주었던 것입니다.

아내는 지금도 가끔 말합니다. 직장에서 어려움이 있으면 말하라고 합니다. 숨기면 더 병이 되고 마음과 몸을 상하게 되니, 해결책은 없다 하더라도 꼭 식구에게 말하라고 합니다. 가장이라고 해서 반드시 직장에서의 어려움을 내색하지 않는 것이 좋은 것만은 아니라고 합니다.

그러나 난 생각이 다릅니다. 이 땅에서 가장은 그것을 이겨내야 합니다. 자기 하나만 희생하면 남은 식구 모두가 행복하게 살 수가 있기 때문에 직장에서의 고통을 이겨내야 하고, 또 집에 와 그런 말을 해서 식구들 마음을 불안하게 해주면 안 됩니다.

이 땅의 가장은 강해야 합니다. 희생심이 투철해야 합니다. 자신은 비록 힘들게 생활하더라도, 그것이 밑바탕이 되어 식구들이 행복하게 살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이 땅의 가장은 집에서 세상이 떠나갈 듯 마음껏 웃어도 되지만, 눈물은 절대로 보이면 안 됩니다. 정 참기 힘들면, 혼자서 조용히 밖으로 나가 아무도 없는 곳에 가서 울어야 합니다.

이 땅의 가장은 최고의 연기자가 되어야 합니다. 식구 앞에서 항상 자신감이 넘쳐흘러야 합니다. 직장 일로 몸과 마음이 지쳐 축 처진 어깨를 하고 온다 하더라도, 집 앞에서는 몸을 똑바로 세우고, 얼굴에 미소를 띠우고, 큰 기침을 하며 문을 열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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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요즈음 큰 기쁨 한 가지가 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오마이뉴스'를 보는 것입니다. 때때로 독자 의견란에 글을 올리다보니 저도 기자가 되어 글을 쓰고 싶은 욕심(?)이 생겼습니다. 우리들의 다양한 삶을 솔직하게 써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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