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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999년 2월 12일과 13일 양일 동안 미국의 유력언론인 CNN과 USA투데이는 이색적인 여론조사를 실시했다. 주제는 '인간 빌 클린턴 대통령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였다. 1034명의 응답자 중에서 60%가 '인간 클린턴에 실망했다'고 대답했다. 이 여론조사는 르윈스키 성추문으로 시작된 대통령 탄핵안이 상원에서 부결된 직후에 실시됐다.

클린턴의 탄핵국면은 무려 13개월이나 지속됐다. 1998년 1월 클린턴은 성추문에 대한 위증과 사법 방해 혐의로 청문회에 섰다. 클린턴 대통령은 하원에서 탄핵소추를 받았고, 1999년 2월 상원에서 부결시킨 뒤에야 탄핵의 악몽에서 헤어날 수 있었다.

가장 완성된 민주주의 국가, 세계의 패권국가라 불리는 미국의 대통령이 섹스 스캔들로 여론의 뭇매를 맞으며 13개월 동안 하원, 상원을 다니며 자신의 결백을 주장해야 했던 것이다.

클린턴이 대통령 직위에서 물러난 지 3년이 지났지만 누구도 그를 '실패한 대통령'으로 인식하지 않는다. 여전히 민주당의 유력 정치인들은 클린턴의 지원 유세를 고대하고 있을 정도다. <중앙일보>의 한 기자는 기자칼럼을 통해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은 미국의 성공한 대통령 중 한 명이다. 1990년대 미국의 경제호황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클린턴의 업적이었다'라고 격찬했다.

클린턴 대통령의 예를 살펴봤듯이 탄핵을 받았다는 사실 자체가 대통령을 평가하는 모든 기준은 될 수 없다. 더군다나 그 탄핵이 '사과하면 탄핵하지 않겠다'는 식의 정략적 목적에 의한 것이라면 아예 평가기준이 될 수 없을 것이다.

탄핵 지지자들 중에는 국회의원들이 법에 따라 다수결로 처리한 것이기에 문제될 게 없다는 주장이지만, 그것은 '다수결의 횡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탄핵을 주도한 한나라당의 태도 또한 이번 탄핵이 어느 정도로 정략적이었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한나라당 대표 경선에 출마한 김문수 후보는 '탄핵 취소를 재고'중임을 공개적으로 밝혔다. 일부 소장파 의원 및 총선 후보들 역시 탄핵 역풍을 피할 수 있는 방법 찾기에 골몰하고 있다. 국가와 민족의 앞날을 위한 탄핵이었다면 '고민'할 필요가 뭐가 있었겠는가. 한나라당의 고민은 탄핵 자체가 정치적이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 조선일보

조선일보 <김대중 칼럼> : '탄핵' 이후

상황이 이와 같고, 노 대통령에 대한 탄핵의 의미가 이와 같은데 지난 20일에 게재된 <조선일보> 김대중 칼럼은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가? 김대중 기자는 워싱턴에서 제법 오랜 기간 체류했는데, 그 동안 '탄핵 이후'의 클린턴에 대해서 들은 바가 전혀 없었나 하는 의심이 들 정도이다.

(탄핵 이후) 그가 대통령직에 복귀하는 경우에도 우리는 심각한 문제에 봉착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그가 비록 살아남더라도 정치적으로는 이미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상처로 인한 분노, 자괴감, 수치심이 과연 어떤 형태로 우리 사회에 낙진할지는 가늠하기 어렵다. – 김대중 칼럼 '탄핵 이후' 중

김대중 기자는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한 법학도였지만, 탄핵 사유와 국회에서 탄핵안이 가결될 당시의 절차적 정당성 등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어 보인다. 어떤 형태로든 '탄핵을 받았다'는 그 이유만으로 이미 대통령은 분노, 자괴감, 수치심에 어쩔 줄 몰라 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미국 클린턴 대통령은 집권 후반기에 탄핵정국을 겪고도 성공적으로 업무를 수행했는데, 이제 임기 중 1년이 지난 한국 대통령은 탄핵을 받은 그 사실 자체만으로 이미 '치명적'이기에 이후로도 문제가 된다는 논리는 또 무엇인가.

하지만 그쯤에서 끝낼 김대중 기자가 아니다. 그는 대통령이 '탄핵'에서 돌아오고, 총선 정국과 맞물려 열린우리당이 압승할 경우 '우리 사회는 걷잡을 수 없는 혼돈에 빠져들 것'이라는 예언가적 능력까지 칼럼을 통해 과시하고 있다.

상처 입은 정치인(대통령)의 난폭한 몸부림 같은 것으로 인해 그 균열의 폭과 분열의 깊이는 더해갈 것이다. 총선 결과 열린우리당이 제1당의 위치를 넘어 과반수를 차지할 경우 여권의 오만과 독주가 상처 입은 대통령의 분노 내지 복수심과 결합하게 될 때 우리 사회는 걷잡을 수 없는 혼돈에 빠져들 것이며(후략)… - 김대중 칼럼 '탄핵 이후' 중

헌정 초유의 대통령 탄핵안을 가결시킨 제16대 국회는 한나라당이 원내 과반수 의석을 차지하고 있다. 김대중 기자에게 혼미스러운 현 정국에서 야권의 오만과 독주가 어느 정도라고 생각하는지 묻고 싶다.

또 과연 김대중 기자가 야당의 의회권력 남용에 환멸을 느껴 여권을 지지하는 국민들이 상당수임을 알고있는 지도 의문이다. 게다가 대통령이 분노 내지 복수심을 통해 '보복'할지 모른다고 암시하는 대목에서는 무책임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클린턴 대통령을 한 번 더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상원에서 자신에 대한 탄핵안이 부결된 직후 기자회견을 갖고 탄핵정국을 우려했던 국민들에게 사과했다. 그리고는 일상으로 돌아왔다.

우리의 경우는 어떤가. 언론에 따르면 국회에서 탄핵안이 가결됨으로써 업무가 정지된 노무현 대통령은 독서와 등산, 향후 국정운영에 대한 구상을 하고 있다. 이순신의 백의종군과 그 이후를 다룬 김훈의 '칼의 노래'를 읽었다고 한다.

이제 조선일보가 자랑하는 문재(文才) 김대중 기자의 글을 보자. 영향력 1위 신문사로 알려진 <조선일보> 간판 글쟁이의 논리와 전개가 이 정도라면 왜 우리에게는 전 국민이 인정하는 성공한 대통령을 찾아볼 수 없는 지 대충 감이 온다.

탄핵사태는 그 결과에 상관없이 우리 국민의 일상사, 일상적 생활과 판단 영역에 커다란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제부터 우리는 '대통령다운 대통령이 없는 정치'가 얼마나 무모하고 불안한 것인가를 겪게 될 것이다. - 김대중 칼럼 중

우선 김대중 기자에게 헌법재판소에서 심의, 결정되는 탄핵의 결과는 '결과에 상관없이'라는 단어로 그냥 넘길 사안이 아님을 밝혀둔다. 다수의 법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헌법재판소에서 탄핵안이 기각, 부결된다면 탄핵정국으로 인한 혼란의 대부분 책임은 야당이 져야 할 것이다. 당연하지 않은가. 탄핵사유가 되지 않는 것을 의회권력을 통해 나라를 뒤흔든 책임은 교과서에도 기록될 만한 사안이다.

그리고 '탄핵 이후' 대통령다운 대통령 없는 정치를 언급하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칼럼에 실린 김대중 기자의 사진을 다시 봐야만 했다. 진정 우리나라가 지향하는 것이 법적, 제도적 민주주의라면 '탄핵 이후' 대통령은 업무에 복귀하면 되고, 헌법과 국민이 명령한 대통령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하면 된다. 왜, 도대체 무슨 의도로 '대통령다운 대통령 없는 정치'를 언급하고 있는가. 그에게 누가 그럴 권한을 주었는가.

클린턴은 괜찮았는데 노무현은 안 되는 이유는 무엇인지 이제 그가 답해야 할 차례다. 김대중 칼럼을 비판적으로 읽은 상당수 독자들은 그가 우회적으로 노 대통령에 대한 '하야(下野)'를 촉구한 것으로 해석했다. 아무리 개인의 이름을 걸고 게재되는 글이라 하지만 '지면의 사유화'는 정녕 이대로 묵과해도 좋다는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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