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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막국수가 막 만들어 먹던 메밀국수이듯 막걸리도 막 걸러 먹는 술이랍니다. 한잔 드셔보시지요. 뒷골 땡기지 않은 술입니다.
ⓒ 김규환
전주의 새 명물

호남 전주는 판소리의 고장이다. 국악의 향기가 물씬 풍기는 소리의 고향이다. 남문 시장의 콩나물 국밥도 유명한데 욕쟁이 할머니의 콩나물 국밥은 내가 먹어본 콩나물 국밥 중 뜨뜻미지근하면서도 그 맛이 일품이다. 시원하면서도 매콤함에 콩나물 씹히는 맛이 다르다.

비빔밥은 더 잘 알려진 전주의 명물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세 가지에 덧붙여 전주를 대표할 만한 명품이 최근 몇 년 새 생겨 사랑을 받고 있다. 오늘은 주말을 이용하여 서울에서 2시간 30분이면 도착하여 실컷 먹고 차비까지 챙겨 돌아올 수 있는 한 방법을 소개할까 한다.

▲ 누룩이 방안에 가득했던 시절이 있었답니다. 그 시절이 그립습니까? 막걸리에 녹아 있답니다.
ⓒ 김규환
막걸리, 탁주, 농주, 노동주, 서민주, 가양주 그리고 밀주의 운명

막걸리 탁주(濁酒)는 농주(農酒)로도 불리며, 노동주(勞動酒) 또는 서민주(庶民酒)로서 소주(燒酒)와 함께 오랜 동안 사랑을 받아왔다. 예로부터 '밀주'라는 것이 '밀'로 담근 술이어서가 아니라 관청의 미곡(米穀) 절약 차원에서 단속이 심하여 끊고는 살 수 없거나 농사와 제사 축제 때 꼭 필요한 음식이라 비밀리에 또는 처절하게 몰래 숨겨가며 가양주(家釀酒)로 담가먹던 '밀주(密酒)'라는 뜻이다.

한 때 밀가루로 술밥을 대신하여 명맥을 이어오다가 80년 대 후반에 이르러서야 주세법이 개정되어 전통주(傳統酒) 장려 차원에서 재차 활로를 찾으려던 찰나 88올림픽을 기화로 대중화된 생맥주에 그 자리를 내줬고, 특유의 발효 냄새 때문에 주당들에게 차차 잊혀져 가는 술이기도 하다.

▲ 여기 차려진 호박전에다 먹어도 서너 병은 먹을 수 있는데...
ⓒ 김규환
술 익는 방과 술 거르시던 어머니와 술지게미 훔쳐먹던 아이

어릴 적 집안 술도가지 속에서 "뽀글뽀글", "뻐끔뻐끔" 거품을 물고 술 익는 소리가 꽤 많은 사유를 돕는 매개체이기도 했다. 어린 나에겐 '저걸 먹어 말어?' 하며 괜한 궁리를 유발하기도 했다. 아버지는 술을 거르기 전에 위에 맑게 뜬 청주(淸酒 일본말로 '정종'이라 함)를 맨 먼저 몇 그릇 떠드시고 다음으론 밥테기 둥둥 뜬 동동주라는 우윳빛 술을 마셨다.

그러고 나서 어머니는 맑은 물동이를 옆에 놓고 술찌게미(술지게미 또는 술찌꺼기의 사투리)를 주물럭거려 짜고 물 부어 희석 과정을 거쳐 틉틉한 막걸리 탁주를 맨 나중에 걸러 내셨다.

그 술지게미 돌라 먹다가 해롱해롱했고, 깨복쟁이 불알친구들끼리 이집 저집 돌며 술독을 내기도 했던 추억의 막걸리. 어릴 적 나는 둥그런 막걸리 통을 싣고 오는 바퀴 세 개 달린 자동차 뒤를 간간이 따라 다녔던 기억도 남아 있다.

▲ 한 술집을 풍경 이제 안으로 들어가 볼까요.
ⓒ 김규환
막걸리대학 그 후…

모범생 중 한 명이었던 나는 사실 초·중·고 시절에는 막걸리 시큼한 냄새 때문에 입에도 대지 않았다. 인생이 이렇게 바뀌려고 그랬는지 80년대 후반에 들어간 '막걸리대학' 정문 쪽에는 막걸리 집이 고모집, 마마집, 이모집, 호질, 우리들의 집 등 50여 곳이나 되었지만 대부분 사라지고 한 두 곳만 명맥을 잇고 있다.

날이면 날마다 막걸리로 살다보니 첫 등록금을 대준 큰형에게 "대학이 사람 망치는 곳인가 보다"는 핀잔까지 듣기도 했다. 이젠 고인(故人)이 되었지만 조카인 자신의 자식들만큼이나 아꼈던 형은 집안의 유일한 희망이던 나에게 주먹질까지 해대며 술을 작작 마실 것을 강조하기도 했다.

대학 들어가자마자 학과, 동아리, 학회, 동문회에서 막걸리 사발식이 이어졌다. 쉬는 시간에는 잔디밭에서 춤판에, 막걸리 판이 이어졌다. 간혹 수업 시간에도 어떤 선생은 '막걸리로 전두환 정권 5공 말기의 울분을 씻어내자'며 학생들과 함께 낮술을 마시기도 했다.

▲ 이 집 한상
ⓒ 김규환
고모 집에서 13시간 동안 17만원 어치를 먹게 된 사연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고모집이라는 유명한 술집에 갔는데 당시 막걸리 큰 것 한 병에 1천원하던 때이다. 띄엄띄엄 있던 시험기간에 친구 셋과 함께 오후 2시부터 술을 푸기 시작하여 부어라 마셔라 하다보니 어느새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6시 반을 넘겨 술시(戌時)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달랑 2만원을 가져갔어도 고갈비(고등어 구운 요리) 하나에 잡탕찌개를 시키고 배불리 먹으니 거나하게 취기가 올라왔다. 서로 눈치를 보고 있던 친구들은 고모 없는 틈을 타서 "야, 우리 외상으로 더 먹자."는 제안에 그렇게 하자며 다들 동의했다.

마침 건너편에 홀로 앉아 고모와 대화를 하며 술을 마시고 있는 중년의 신가가 눈에 띄었다.

먼저 말을 걸어오는데 "이봐 학생들 술 더 먹고 싶어?"
이구동성으로 "예."하는 수밖에 없었다. 신설된 학과라 선배도 없고 달랑 동기들만 있던 한문학과 네 명의 새내기들에겐 그 분은 주신(酒神) 박카스께서 내린 구세주였다.

그날은 12년 선배가 사장으로 진급을 하여 고대 앞 고모집 주인께 인사차 들른 날이었다. 호기를 놓치면 낭패다. 더군다나 술 마시는 사람이 공술 싫어하는 경우를 봤던가. 선배님께 객기로 인사치레를 하고 합석하게 되었다.

그 때부터 마신 막걸리 양은 정확히 모르지만 1차에서 자리를 옮기지 않고 마신 술이 현금으로 17만원 어치였다. 무려 13시간 동안 미친 듯 먹어 치운 술이 다른 술도 아닌 막걸리였으니 잠에 취할망정 그날 우리에겐 알콜에 취한다는 건 어울리지 않았다.

그 고모집의 주인이신 고모로 불리는 분은 고대생 수천 명에게 밥을 먹여주셨던 분이다. 거기다 90년까지는 술값을 종용하지도, 학교로 받으러 오시는 법도 없이 돈 없는 아이들의 양심을 더 믿었던 고마운 분이었으니 총장은 몰라도 그 분을 모르면 간첩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였다.

새벽 3시까지 이어진 술자리에 막판 2차로 부어줬던 소주 때문에 고주망태가 되었다. 선배님이 챙겨준 택시비로 무사 귀가 할 수 있었던 그날은 평생 잊을 수 없는 날이기도 하다.

▲ "자...자...한 잔들 들자고."
ⓒ 김규환
김매다 먹고, 비오는 날 부침개 부쳐 먹고, 홍탁 삼합에도 깃든 막걸리 맛

막걸리는 어떨 때 먹으면 맛있을까? 논에 김매다 한 사발 쭈욱 들이키고 흙탕물 묻은 손으로 김치 쪼가리 하나 입에 조심히 가져다가 질근질근 씹는 맛이 첫째고, 비오는 날 부침개 젓가락으로 툭툭 찢어가며 쇠그릇에 먹는 맛이 다음이다.

장작을 패든 퇴비 짐을 나르든, 나무하러 갈 때 한잔 걸치면 배고픔 잊게 하고 허리까지 덜 아프게 살며시 마취효과를 발휘하는 마력을 지녔다. 곡주(穀酒)의 위력은 여지없다.

얼마 전 팔 순 할머니께서 막노동하는 환갑이 가까운 아들에게 속 버린다고 위장 깎는 소주 먹지 말라며 손수 댁에서 담가 사랑을 주신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바이기도 하다.

누룩과 술밥인 고두밥 그리고 효모의 만남으로 발효 과학을 거치면서 술이 발효가 되어 물을 만나 재탄생하는 막걸리는 홍탁삼합(紅濁三合)에도 빠지지 않는다. 도톰한 홍어와 돼지고기 삶은 것을 묵은 김치에 큼지막하게 싸서 오물오물 오도독 씹다가 막걸리 한잔 대접에 가득 따라 단번에 비우는 그 정신은 바로 우리네 서민의 정서다.

▲ 전주식 동동주랍니다. 정말 죽입니다. 혼자 저 한 통을 다 비웠더랬습니다.
ⓒ 김규환
생선, 고기, 제철 나물에 찌개까지 식탁을 점령하는 전주 막걸리집 풍경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전주로 가보자. 맛의 고향, 맛라도 호남에 가면 일단은 푸짐한 상차림에, 넉넉한 주인의 배려, 친절로 길들여진 구수한 사투리까지 먹을 수 있다.

먼저 상차림을 보면 여섯 명이 허기진 상태로 가도 막걸리 한 사발로 목을 축이고, 30여 가지 사시사철 제철에 나는 갖가지 안주가 차려져 있다. 두릅 철에는 두릅나물이, 쑥이 풍성할 때는 쑥 된장국이 올려지고 고등어에 갈치, 굴비가 사람 들어오는 숫자에 따라 그냥 차려진다.

나물도 시시때때로 변한다. 파김치, 취나물, 고사리, 파래, 쑥갓, 시금치 맛 볼 수 있다. 도토리묵에 두부지짐, 김치파전, 감자전, 호박전 정갈하게 놓이고 달걀찜과 미역줄기, 멸치볶음, 생굴, 꼬막도 내오고 콩나물국, 조개탕, 조기찌개, 갈치조림 즐비하게 식탁 위를 점령한다.

가본 사람은 안다. 생선조림과 오징어 꼴뚜기도 빠지지 않는다. 차려진 음식에 밥만 팔지 않을 뿐이다 '배보다 배꼽이 더 크다'는 게 이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인 듯싶다. 푸짐하고 걸게 차려진 인심에 먹는 것마다 호남 특유의 맛깔 난 상을 받고 나면 술상 한번 잘 받았다는 생각에 주인에게 미안한 마음마저 들게 하여 오래 머물지 않고는 차마 떠나지 못하는 상황으로 내몰리고 만다.

▲ 아주머니 이래가지고 남겠어요? 몇 번 여쭤도 그래도 남는다는데 정말 할 말이 없습니다.
ⓒ 김규환
"그 많은 안주가 다 공짜라구요?"

수도권 도시 문화에 길들여진 나로서도 저 많은 안주 값을 어찌 치르나 걱정이었다. 그런데 맛있다고 다 먹은 안주를 주문하지도 않았는데 주인아주머니가 또 가져오신다. '어, 안 되는데…. 아줌마 안주 값 얼마요?' 묻기도 그렇다.

같이 간 사람이 한다는 말,

"김 선생 뭐 기분이 좀 그런 것 같소."
"아아…아닙니다. 그냥 안주가 허벌나게 나와서 그래요."
"안주 값 걱정 말고 그냥 드시오. 여기 나오는 안주는 죄다 무룐께. 전주 음식 내오는 전통이 그렇다오."


나는 전주시 완산구 효자동, 삼천동 일대를 두 번 방문했다. 1년에 꼭 한번 찾는 까닭은 서울에서 2시간 30분 정도 되는 거리지만 막걸리를 마시러 가는 재미에 푹 빠졌기 때문이다. 안주 값은 막걸리 값만 치르면 되니 교통비 빠지고 숙박비마저 빠진다.

▲ 이걸 어찌 다 먹을까요. 막걸리만 시키면 된답니다. 많이 드세요.
ⓒ 김규환
빠지고 싶은 맑고 노란 술 동동주 먼저 한 사발

이제 막걸리를 본격적으로 마셔보자. 맨 먼저 나는 동동주라는 술 한 바가지를 시켰다.

'어 이상하네. 여기 동동주는 색깔이 왜 이래? 더군다나 동동 뜬 밥알도 없잖아.'

정말 여기 동동주는 노란 빛깔이 돌뿐 아주 맑다. 맑다못해 투명하다. 술잔에 사람 얼굴이 비칠 정도니 몸을 줄여서라도 한번 빠져보고 싶은 강렬한 충동을 일으킨다. 술이 담기는 잔에 따라 때론 커피 향이 튀어나올 듯 하다. 뭔가 깔끔한 달콤함이 숨어 있을 동동주 한잔 혀끝에 묻혀 음미하는 시간을 길게 잡았다.

97년 이후 전주는 비빔밥이 아닌 막걸리 도시다

몇 순배(巡杯) 갖고 노닥거리며 제각각 다른 나물과 생선, 고기를 맛보며 국이나 찌개를 떠먹는다. 이쯤 먹었으면 이제는 물 좋은 전주의 막걸리 차례다. 수도권의 어느 유명 막걸리 제조사 막걸리는 이제 달기만 할 뿐 누룩 맛은 전혀 없고 뒤끝이 별로다.

그런데 어느 시인이 '이제 전주는 비빔밥 도시가 아닌 막걸리 전시장 같다'는 표현에 걸맞게 호남의 내 노라는 막걸리만 모아놓았다.

너무 걸쭉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아예 훌렁훌렁 물을 과다 희석하지도 않은 술, 목에 걸리지도 않으면서도 쭉쭉 목구멍으로 끌어당기는 술, 달짝지근하면서도 긴 여운을 드리워 다시 한 모금을 마시지 않고는 적적해서 가만있질 못하게 하는 술에 발가벗겨진 듯 놓여 있는 신세다.

"자자…들자고."
"쭈욱 한잔 드세요."
"캬~"


연거푸 마셔도 소주처럼 싸하게 가슴을 적시지는 않지만 거미줄처럼 얽히고설킨 핏줄을 따라 기분 좋게 느릿느릿 온 몸으로 퍼진다. 노란 양은 주전자에 담긴 두 되짜리는 금세 바닥이 난다. 주모를 불러 채워달라면 꽉꽉 넘치게 밟아 안주 접시를 척척 갖다 바치는 술집 어디 있을까?

"아줌마 이래가지고 뭐가 남아요?"
"몰라라우, 그래도 째까 남은께 하는 것 아니겄소."
"서울에서 이렇게 하면 대박이겠구만…."
"내가 조금 줄여서 먹으면 요즘 같은 세상에 여러 사람이 와서 많이 먹어주니 서로 좋은 것 아니겠어요."
"들리기로 타지에서도 이런 시도를 했다면서요?"
"대전에서 이렇게 똑같이 해봤다는데 금방 문닫고 말았대요."
"근데 여긴 언제부터 이렇게 막걸리 촌이 생기게 되었습니까?"
"아마 97년이 지나서인 것 같아요. IMF 뒤로 하나 둘 생기기 시작하더니 3년 전부터 이렇게 늘어부렀당께요."


▲ 다음날 아침 전주 남문시장에 들러 욕쟁이 할머니를 찾아 콩나물국밥 좀 말아달라고 하세요. 콩나물이 보통 집과는 판이하게 다르답니다. 매콤하면서 알싸한 해장국으로 해정하시기 바랍니다.
ⓒ 김규환
서민의 술 허기를 채워 줘 경기 침체와 맞물려 문전성시

막걸리는 서민의 술이다. 서민들이 생활고에 찌들어 힘겨울 때 술 한 잔 없이 어찌 이 세상을 헤쳐 나갈 수 있겠는가. 모든 것 줄이는 요즘이다. 집에서 사다 먹는 술값마저 걱정인 이 때 네 명이 가서 2만원 어치를 먹으니 더 이상 들어가지 않는다. 한 사람 당 5천원 꼴이다.

라면을 삶아 먹은 들 이렇게 푸짐할까. 쌀죽을 쒀 먹어도 가당치 않을 양을 먹어 치웠다. 진수성찬에 술까지 거나해진 동행자들은 "다시 오마"고 단단히 약속을 하고 아쉬움을 가득 안은 채 막걸리 촌을 빠져 나왔다.

그 지역 사람들은 그렇게 때 묻지 않고 이웃과 나눠 먹으며 살고 있었다. 오는 길에 비빔밥 먹고 콩나물국밥 백반 먹고 올라오면 결코 아깝지 않을 맛 여행 한 번 떠나 보자.

덧붙이는 글 | 절대 후회하지 않을 겁니다. 손 맛이 차이는 있어도 어느 집이나 잘 나오니 덤터기 쓸 일도 없답니다. 한번 떠나보시지요.

여기에 또 홍어가 등장했는데요 요즘 홍어는 방송과 신문에 자주 나옵니다. 혹시 홍어에 관심있는 분은 "홍어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모임" cafe.daum.net/hongaclub 을 방문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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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환은 서울생활을 접고 빨치산의 고장-화순에서 '백아산의 메아리'를 들으며 살고 있습니다. 6, 70년대 고향 이야기와 삶의 뿌리를 캐는 글을 쓰다가 2006년 귀향하고 말았지요. 200가지 산나물을 깊은 산속에 자연 그대로 심어 산나물 천지 <산채원>을 만들고 있답니다.도시 이웃과 나누려 합니다. cafe.daum.net/sanchaewon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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