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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들의 일본에 대한 이중성은 어제 오늘의 이야기는 아니다. 조영남의 발언은 충분히 이해가 가는 내용이고 새로울 것도 없다. 그것이 가수, 공인 조영남이 말했기 때문에 시선을 받을 뿐이다.

아무리 용기있는 행동이라도 이중성의 원인과 사정을 지적하지 않는다면 비난받을 수 있다.

물론 조영남의 발언이 논란이 되는 것 자체가 우리 사회의 슬픈 자화상이다. 비판은 우리의 상처를 제대로 짚는데서 시작해야 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한국인들의 습성에 대한 비판으로 애국투사같이 굴면 진짜 친일파가 된다.

조영남은 이렇게 말한다.

"한국인들은 왜 일본을 폄하하는가. 일본은 우리보다 앞선 나라다. 이제는 일본의 앞선 점을 인정하고 그들의 선진 문물을 받아들여야 한다."

100년전의 친일파 논리와 같아 보인다. 그가 자신을 100년만에 친일파라고 하는 이유도 이를 염두한 것이다. 그러나 100년전의 친일파의 논리와 조영남의 말이 같을 리는 없다.

조영남은 일제 시기의 경험이 거의 없는 세대. 해방둥이인 그의 통찰에 대한 무감각성이 걱정될 따름이다.

다섯 가지만 이야기 해보자.

우선 그의 주장과 달리 오늘은 1905년 을사조약 시점의 100년 전과 다르다. 100년 전에는 일제 침탈 경험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한국인을 지배하고 있는 두가지 심리를 간과하게 된다. 한 가지 심리는 분노와 폄하 심리의 연계다.

조영남은 한국인들이 일본을 앞선 나라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지 않다고 했다. 그러면서 일본을 버리고 친미만 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한국 사람들은 모두 일본이 앞선 것을 알고 있다. 분명 한국인들에게는 일본을 비하하거나 폄하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일본을 인정하고 있지 않은 게 아니라 분노에서 비롯하는 것이다.

한국 사람들은 세상의 불합리함에 승복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렇게 극악 무도한 일본이 잘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회, 경제, 문화에서 앞서 있다는 사실을 모른 척 묻으려 한다.

여기에 일본이 앞선 것에 대해 다른 심리가 지배하고 있다. 그것은 두려움과 공포다.

한국인들은 일본이 앞서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순순히 그렇게 인정하고 말면 친일파가 등장하고 다시 나라를 잃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다. 또한 일본에 약한 모습을 보이면 승복하는 것이라는 방어적 공포 심리를 지니고 있다.

이런 공포 심리에 일본이 앞서 있다는 것을 아는 어른들은 뭣 모르는 아이들에게 일본의 후진성을 억지로 주입해 왔다. 하지만 시간 문제다. 진실은 언제나 드러나게 되어 있다.

그러나 100년전에 일본을 배우자고 한 친일파 때문에 결국에는 나라를 잃고 수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는 정신적 외상, 트라우마가 한국인들을 지배하고 있다. 이 때문에 한국인들은 일본에 마음의 문을 열지 않는다. 정작 뒤로는 호박씨를 깔지언정 말이다.

이를 한국인의 잘못으로만 돌릴 수는 없다. 가해자인 일본인들의 사죄와 배상이 없는 한은 불가능하다. 일본이 나서는 상처의 치유없이는 안된다는 의미이다. 조영남은 이 같은 점을 같이 지적했어야 한다.

두번째, 이러한 논의의 연장선상에서 '친일파'라는 용어를 함부로 사용하는 것은 또 하나의 황색 저널리즘 어법이다. 우선 '친일파'는 대등한 의미가 아니다. 대등한 나라에 친OO파라고 하지는 않는다. 친일파 자체가 사대주의적 용어이자 종속적 관계를 품고 있다.

친일파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대등한 관계의 친구나 동지적 관점이어야 한다. 그러나 일본은 한국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한국은 적어도 일본을 쳐들어 갈 생각은 하지 않았고 지금도 그렇다. 그러나 일본은 끊임없이 한반도 정벌을 모색하고 있다.

이러한 상태에서 한국인들은 끊임없이 경계를 해야 한다. 한국인이 일본을 무시하려는 것은 또 다른 대응 심리다. 따라서 이중성을 통해 경계를 유지한다. 일종의 한국사회가 가지고 있는 방어기제다. 이러한 방어기제를 아예 없애자고 하는 것은 합리와 이성으로 되는 문제가 아니다.

무엇보다 친일파에는 나라를 팔아먹고 일제에 빌붙어 동포들을 착취하고 죽음으로 몰아넣은 인사들이라는 의미가 배어 있다. '친일파'라는 말에는 수백만 사람의 죽음과 한과 고통이 배인 눈물의 원한이 서려 있다. 그런데 조영남은 자신은 '친일파'라면서 희화화한다. 이런 말을 함부로 사용하는 것은 이해가 안된다.

세번째, 그렇다고 해서 조영남의 말대로 한국인들은 일본을 부정했는가. 천만의 말씀이다. 지식인이나 정책가들은 일본을 끊임없이 흠모하고 베껴왔다. 특히 문화 지식인이나 기술자들은 말할 것도 없다. 한국의 수많은 대중문화나 사회적 기반시설, 경제 하부구조에 일본의 냄새가 안배인 곳이 없다. 뭘 더 베끼고 가지고 오자는 말인가.

그럼에도 그들이 자신들이 일본에 대해 흠모하고 있다고, 베끼고 있다고, 혹은 배우고 있다고 말하지 않은 것은 한국인들의 한과 상처가 너무나 깊었기 때문이다.

겉으로는 말을 못하지만 속으로는 모두 다 베껴왔다. 즉 한국인들의 상처가 치유되지 않은데 원인이 있는 것이지 일본이 앞선 것을 인정하지 않거나 일부러 비하 하는 게 본질이 아니다. 책임은 일제의 역사에 대한 무책임에 있다.

자유주의자가 낭만적으로 친일파 운운하는 것은 몰역사적이다. 낭만적 자유주의자는 몰역사적이어야 그 존재 의미를 찾는다. 몰역사적인 측면이 일본과 같아 "친일파"이겠다. 조영남씨는 예상이라도 한듯 몰역사적이라고 욕하면 몰역사적으로 살겠다고 했다.

문제는 혼자만 그렇게 산들 누가 무엇이라고 하겠는가. 혼자 살려거든 왜 그렇게 공론화 시키는가 말이다.

이른바 '조영남 발언'은 일제의 아픈 추억이 거의 없는 세대가 이제 사회 원로 축에 들기 시작했고 앞으로 연이어 터질 몰역사적인 발언의 신호탄이라는 데 의미 있을 뿐이다.

네번째, 좋은 일본을 놔누고 미국에 친미하며 산 수십 년의 세월을 반성한다고 했다. 그러나 친미를 했기 때문에 일본을 놓친 것은 아니다. 일본은 문화 경제적으로 남한 경제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일본은 새삼스럽게 지적하지 않아도 강대국이다.

단지, 한국이 미국에 의존하는 것은 안보 문제도 있지만 엄청난 시장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일본 보다 미국의 시장이 크다는 말이다. 미국 중심의 자본주의 상품 경제에 종속되어 있기 때문이지 한국인의 습성 때문이 아니다.

친미를 80% 하고 친일을 20% 한다고 불균형이 회복되는 문제가 아닌 것이다. 친미 몇 % 친일 몇 %가 아니라 우리가 주체적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를 논의할 시점이다. 그동안 일본과 미국에서 부지런히 베껴온 문화를 어떻게 주체화 할 것인가를 말해야 한다.

다섯번째, 일본을 한국인들이 너무 모른다는 것이 지식인들의 지적이다. 그러나 수십 년간 친미를 해온 미국을 한국인들이 잘 안다고 할 수 있을까? 한국인들은 미국에 대해서도 잘 알지 못한다. 왜 그럴까? 그것은 진짜 관심의 대상인가, 전략적 관계일 뿐인가의 차이에서 빚어지는 일이다.

조영남의 주장은 역시 전략 차원이다. 일본이 좋기 때문이 아니라 앞서 있기 때문에 친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진정 상대방을 알려면 상대방을 좋아해야 한다. 무조건 한쪽이 좋아하는 것은 좋아하는 것이 아님은 곧 알 수 있다. 따라서 일본이 한국에 호감과 관심이 있을 때 진정 서로 알고 친하게 지낸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아울러 잘 알거나 잘 배우고 있다는 기준은 모호하다. 상대적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친일같은 행동을 한다고 해서 일본을 잘 알고 잘 배울 것이라는 생각은 잘못이다.

일본을 드러내놓고 배우자는 운동이 일어나도 일본을 한국인들이 너무나 모른다는 소리는 계속 나오게 되어 있다. 그것은 일본과 한국을 대등한 관점에서 보지 않기 때문에 벌어지는 주관성 때문이다.

거꾸로 일본이 한국에서 배울 점이 없을까. 분명 있다. 그러나 일본은 한국에 대해서 무관심이다. 일본의 무관심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는다. 특히 문화는 우열이 있을 수 없다. 한국의 정체성과 문화적 자존심이 없는 바에야 조영남 발언은 열등감의 변형일 뿐이다.

결국 우리 내부만 성토할 게 아니라 일본에도 성토해야 균형이 회복된다. 문제는 일본이 행한 역사적 트라우마에 대한 책임이 선행되어야 한다.

또한 주변 국가에 대한 책임있는 평화적 관계 설정이 이중성을 해소하는 첩경이다. 이때 대등한 관계와 일본에 대한 주체적인 학습의 공론화가 가능하다.

덧붙이는 글 | 고뉴스에도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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