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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병기
옥천은 충청도와 경상도의 갈림길에 있는 고장이다. 신라 시대엔 고시산군(古尸山郡)이라 불리다가 조선 태종 때 지금의 이름으로 바뀌었다. <향수>의 시인 정지용의 고향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곳이다.

옥천 신시가지를 벗어나 보은 방향으로 조금만 가다보면 옥천 사람들이 구읍이라 부르는 하계마을에 시인의 옛집이 있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 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던 곳.

시인은 그곳에서 세상으로 난 길에다 자신의 첫 발자욱을 찍었다. 그리고 세상 속으로 난 길을 아장아장 걸어갔다.

유리에 차고 슬픈 것이 어른거린다/ 열없이 불어 서서 입김을 흐리우니/ 길들은 양 언 날개를 파다거린다 (시 <유리창>)

막 새로운 세기가 시작되고 있었지만 그의 조국은 이미 식민지의 운명 속으로 성큼 다가서고 있었다.

그는 일찍이 고향을 등졌다. 사춘기가 막 시작되던 열 네살 즈음이었다. "엷은 조름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벗은 아내"가 있는 고향.

아마도 막 눈뜨기 시작한 그의 자아는 권태와 무력감을 견디기 어려웠을 것이다.

할 수만 있다면 그런 막막한 현실로부터 숨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세계로부터 머리카락 한 올 보이지 않게 꼭꼭 숨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므로 시인은 차라리 세계를 향하여 제 오장육부를 드러내는 길을 택했다. <카페 프란스><이른 봄 아침><바다><향수> 등의 시를 발표하며 그는 문단에 나왔다. 그의 오장육부가 차츰 햇살 아래 드러나기 시작했다.

나는 자작의 아들도 아모것도 아니란다.
남달리 손이 희어서 슬프구나! (시 <카페 프란스>)


ⓒ 안병기
ⓒ 안병기
실개천에 걸쳐 있던 청석교. 다리 아래에 '황국신민서사'라는 글이 새겨져 있는 파란만장한 돌이다.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났고 그는 세계로부터 홀연히 증발하고 말았다. 북한군 문화선전대로 참여했다는 설도 있고 북한군의 폭격에 사망했다는 설 등등.

그리고 세계를 향해 드러냈던 오장육부같은 그의 시들도 어둠속에 묻히고 말았다. 1988년이 오고나서야 비로소 그의 시는 세상을 향해 제 면목을 드러낼 수 있었다.

30년 동안 그의 시는 얼마나 세상으로 나오고 싶어 온몸이 간질간질 했을까. 시인의 생가 마당 한켠에서 뚜껑 닫힌 우물을 열어본다.

이념이란 뚜껑에 닫힌 그의 시의 우물. 시인이란 어떤 존재인가. 무엇하는 존재인가. 무엇을 꿈꾸는 존재인가. 시인은 나르시시즘을 앓는 존재이다.

그는 원형이 파괴되지 않았던 옛 삶을 꿈꾼다. 그의 나르시시즘은 비난받을 이유가 없다. 식민지 산하라고 해서 고향을 노래해서는 안되는가. 꼭 저항의 언어를 칼날처럼 갈아야만 하는가.

밤에 홀로 유리를 닦는 것은/ 외로운 황홀한 심사이어니(시 <유리창>)

복원공사가 한창인 육영수 생가

▲ 복원공사가 한창인 육영수 생가
ⓒ 안병기
▲ 복원 공사 이전 육영수 여사 생가 터(2004)
ⓒ 안병기
정지용의 생가를 지나쳐 몇 백 미터만 더 거슬러 올라가면 육영수 여사의 생가가 나온다. 생가는 지금 복원공사가 한창이다.

내가 이곳에 몇 번이나 왔던가. 그때마다 굳게 닫혀진 일각문 앞에서 멈칫거리곤 했다. 마치 수문장처럼 버티고선 커다란 양버들 한 그루. 행여나 안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작은 틈새라도 있을까 싶어 두리번거리지만 헛수고일 뿐이다.

햇볕은 어떻게 저 높은 담장을 훌쩍 넘어 갈 수 있을까. 바람은 또 어떻게 저 굳게 닫힌 문을 통과할 수 있을까.

1925년 이곳에서 한 아이가 태어났다. 그 울음 소리가 아주 가냘펐다. 결코 다른 아이들의 울음을 압도할 만큼 우렁차지도 않았을 것이다. 세계의 한 구성원으로서의 존재의 크기를 넘어설 만큼 그 울음 소리가 크지는 않았을 것이다.

울음 소리만으로 훗날 그가 한국 정치사의 소용돌이의 한 복판에 서 있으리라고 예측한 사람이 누가 있었을 것인가. 그이는 자신이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는 걸 짐작이나 했을까.

세월이 흘러 그이는 우아한 귀부인이 되었다. 이 땅의 먼지들은 그이의 하얀 한복에 내려앉을 때마다 송구스러워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그가 미소를 지으면 잔뜩 긴장했던 한국사회도 눈치껏 따라 웃었다.

아, 지금이 바로 웃을 때구나. 야수가 곁에 있었으므로 해서 미녀는 더욱 고아했고 뒷감당할 미녀가 있으므로 야수의 광기는 더욱 번득일 수 있었던 것일까.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현실이었다.

권력 역시 시인처럼 자페와 나르시시즘이란 합병증을 앓는다. 권력은 외부로부터 들려오는 소리에 대하여 빗장을 건다. 그리고 홀로 앉아서 자신의 권력에 대한 나르시시즘을 즐긴다. 1974년, 여름 한 방의 총성이 울렸다. 그리고 한국사회는 그이의 고혹적인 미소를 영영 볼 수 없게 되었다.

지난 여름의 부용꽃인듯/ 어쩌면 가장 겸허한 정의인 듯/ 모든 것은 낮아서/ 이 세상에 눈이 내리고 (고은 시 <문의마을에 가서> 일부)

ⓒ 안병기
세월이 시나브로 흘러가고… 오늘 한국사회는 난마처럼 얽혀있다. 저 등나무 줄기처럼 모순들로 얼기설기 엮여져 있다.

그이는 이 모든 상황에 아무런 책임이 없다. 그가 지은 죄라면 고혹적인 미소를 지은 것 뿐이니까. 미소를 범죄행위로 치부하는 나라가 세상 천지 어디에 있단 말인가.

그러나 난 미소가 내포하고 있는 위험요소를 상기하고자 한다. 세계를 은폐하는 음흉한 수단인 미소를. 진실은 항상 미소 뒤로 숨는다. 오냐 오냐, 내가 너를 숨겨주마. 미소야말로 세상의 어느 독보다 위험하기 짝이 없는 독이다.

조선 전기의 선비인 옥천 사람 남수문(南秀文)은 그의 기문(記文)에서 '옥천은 충청도의 이름있는 고을이다. 산이 높고 맑으며 땅이 기름지고 물산은 푸짐하다'고 썼다. 내가 겪은 옥천 역시 그러했다.

그러나 내가 여기 옥천에 와서 생각하는 것은 풍광의 아름다움보다는 사람살이의 천양지차다. 23년이라는 시차를 두고 한 동네에서 태어난 두 사람이 누렸던 삶의 내용이 그렇게 다를 수 있다는 게 새삼스러울 뿐이다.

거의 동시대를 호흡한 사람이라면 두 사람이 누린 삶의 내용도 비슷해야 옳지 않겠는가. 그들이 살았던 시대는 식민지 시대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치더라도 아직도 불평등이 엄연한 사회적 기제로써 작동하고 있는 오늘의 현실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옥천 정지용 생가 옆 육영수 생가 앞에서 나는 이런 시덥지 않은 물음을 던진다. 아직도 장마는 끝나지 않았다. 어느 집에선가 식은 밥 쉬는 냄새가 풍겨져 나올 듯한 그런 날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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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곳을 지향하는 눈(眼)과 한사코 사물을 분석하려는 머리, 나는 이 2개의 바퀴를 타고 60년 넘게 세상을 여행하고 있다. 나는 실용주의자들을 미워하지만 그렇게 되고 싶은 게 내 미래의 꿈이기도 하다. 부패 직전의 모순덩어리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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