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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월 4일 성직자들이 대추분교 옥상에서 농성을 벌이고 있는 가운데 포크레인이 대추분교 철거를 시도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남소연
“평택 다녀온 뒤로 지지도가 많이 떨어진거 같아.”
“지방선거하고 평택 대추리 하고 무슨 연관이 있다고 지지도가 떨어졌겠어요?”
“그렇지 않아 전국적으로 여론이 굉장히 좋지 않았어. 너에 대한 이미지도 그 당시에 많이 안 좋은 쪽으로 흘렀고.”

선거가 끝나고 주변 지인들과 선거결과를 놓고 이야기를 나누는 도중에 도마 위에 올랐던 내용이다. 난 5.31 지방선거에 민주노동당 후보로 안양시에서 입후보했었다. 지난 5월 3일 저녘 평택 대추리에 군 병력이 투입된다는 소식을 듣고 선거운동을 잠시 미루어둔 채 대추리로 달려갔었다.

대추리로 가기 전 마음 속에 갈등이 있었다. 5월 4일부터 5월 5일, 5월 6일까지 빡빡한 일정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5월 4일에는 각 초등학교별로 체육대회가 있었고 동사무소 자치단체가 주체하는 경로잔치도 있었다. 5월 5일에는 시민사회 단체가 주체하는 대규모 어린이날 행사와 마을에서 소규모로 진행되는 어린이날 행사가 있었다. 그리고 5월 6일은 나의 2세 호연이의 첫돌이 기다리고 있었다.

선거운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주민들을 많이 만나는 것이다. 당연히 주민들이 많이 모이는 행사장을 찾아가서 얼굴을 보이고 인사를 하는 것은 선거운동의 기본이다. 그러다 보니 주민들이 많이 모이는 곳을 알아내는 것도 선거운동기간에는 높은 능력으로 평가 받는다. 만약 대추리에 가서 일이 잘못 된다면 며칠간의 선거운동을 망칠 수도 있는 것이었다.

군 부대까지 투입된다면 굉장히 치열한 싸움이 벌어질 수밖에 없다. 군부대를 투입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내 귀를 의심했다. 위수령이 선포된 것도 아니고 계엄령이 선포된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런데 어째서 이런 엄청난 일을 현 정부에서 감행하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대추리에 있는 사람들은 정부를 전복시킬 뜻을 가지고 있는 반군도 아니고 폭도는 더더욱 아니다. 그들은 평생에 걸쳐서 일구어온 농토를 지키려는 늙은 농부들일 뿐이다. 각 지역에서 대추리로 모여드는 시민사회 단체 구성원들 또한 폭도가 아니다. 미군에게 땅을 빼앗길 수 없다는 강한 의지가 있는 사람들일 뿐이다.

군부대까지 투입되는 집회장소에 간다는 것은 후보자로서는 큰 모험이었다. 평화롭게 집회를 끝내고 내 발로 걸어서 안양에 있는 각종 행사장까지 제 시간에 온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러나 군부대까지 투입해서 늙은 농부들을 몰아내고 미군에게 땅을 내주려 안달하는 폭력의 현장에 서있고 싶었다.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싶었다.

전운이 감도는 대추리

바쁜 일정을 마치고 대추리에 도착한 시간은 3일 오후 11시경이다. 대추 초등학교 운동장에 무대가 설치되어 있고 대추리 주민들과 각 사회단체 회원들이 모여 있다. 경쾌한 음악이 흐르고 사회자의 목소리에는 힘이 실려 있지만 사람들의 얼굴에는 긴장감이 감돈다.

경찰병력과 군병력이 내일(4일) 새벽녘에 들이닥칠 가능성이 높다는 판단에 따라 우선은 교대로 자동차 안에서 눈을 붙이기로 했다. 자동차 안에서 잠시 눈을 붙였다는 생각이 들 때쯤 '일어나세요' 라는 소리가 급박하게 들렸다. 시계를 보니 새벽 4시가 채 되지 못한 시간이었다. 부리나케 운동장으로 달려가보니 전경버스가 수를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끝도 없이 밀려오고 있었다.

곧이어 새까만 제복차림의 전경들이 대추초등학교를 포위한 채 서서히 조여들기 시작했다. 전경들과 맨손으로 대치를 하다가 밀리고 밀려서 초등학교 정문까지 왔다. 이제 더 이상 밀릴 곳도 없다. 사방이 포위당했기 때문이다. 진압 경찰들의 태도도 여느 때와는 다르다. 무엇인가 결판을 내려는 의지가 역력했다.

우리는 그 자리(정문 앞)에서 스크럼을 짜고 누워 버렸다. 더 이상은 밀릴 곳도 없었고 몸싸움을 할 수도 없었다. 사방을 전경들이 에워싸고 있었기에 스크럼을 짜고 우리의 결의를 알리는 길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이제 내가 선택할 길은 두 가지였다. 스크럼을 풀고 걸어서 안양으로 돌아가는 것과 끝까지 남아서 우리의 결의를 알리는 길. 난 후자를 선택했다. 이곳에서 나갈 때는 강제 연행되거나 피 흘리며 응급차를 타고 병원을 통해서 나가기로 결정했다. 하늘에서는 수송 헬기가 계속 날아다니며 철조망을 운반하고 있다. 아마도 군 공병대는 철조망 작업을 하고 있을 것이다.

8시경부터 강제 연행이 시작됐다. 성난 전경들은 앞쪽에서부터 방패로 내려찍으며 한 명 한 명 강제로 떼어내기 시작했다. 사방에서 발길질이 날아오고 방패가 나의 배를 가격했다. 서너 명이 팔과 다리를 들고 짐짝처럼 나를 강제 연행했다. 전경들 뒤쪽에는 사복 입은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머리채를 휘어잡고 무릅으로 서너 차례 배와 가슴을 가격했다.

각오는 하고 있었지만 더 이상 저항할 수 없다는 것이 분하고 억울했다. 전경 서너 명이 나를 연행하며 "미안합니다"를 연발한다. 어이없는 일이다. 나에게 미안하다고 해야 할 사람은 이들 뒤에 버티고 서 있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대리인을 내세워서 폭력을 행사하고 사과도 대리인을 내세워서 하고 있는 것이다.

▲ 아내와의 면회
ⓒ 이민선
유치장 신세를 지다

연행되는 차 안에서 계속 이름과 주민번호를 물어왔다. 난 묵비권을 행사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최소한 분한 마음이 가라앉을 때까지는 말을 하지 않기로 다짐했다. 함께 차 안에 타고 있던 학생들도 나를 따라서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연행된 곳은 경기도 군포경찰서였다.

대추리에서 연행된 인원은 30명 정도였다. 학생, 공무원노조 조합원 등. 변호사도 있었다. 민변 출신의 젊은 변호사는 경찰들이 폭력을 행사하는 것에 격렬하게 항의하다가 연행되었다. <오마이뉴스> 문만식 시민기자도 함께 연행되었다. "취재중이었을텐데 어째서 연행되었느냐?" 질문에 그는 "오늘은 주민들과 함께 하고 싶었다"는 대답을 했다.

묵비권 행사는 함께 연행된 변호사의 의견에 따라 풀기로 했다. 단순가담자이기 때문에 일찍 조사를 받아야 단 1시간이라도 빨리 풀어줄 것이라는 변호사의 의견을 존중해 준 것이다. 그러나 그 예상은 빗나갔다. 난 합법적으로 재판 없이 붙잡아둘 수 있는 시한인 48시간을 꼬박 유치장에서 보내야 했다.

유치장 안에 있으려니 답답하기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대추리 상황은 뉴스를 통해서 어느 정도 알 수 있었지만 선거운동 상황과 안양에서 함께 왔던 동지들의 소식은 알 길이 없었다. 휴대폰을 사용하게 해 달라고 담당 경찰관에게 사정도 해 보았지만 소용없었다. 규정을 어길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

다행히 면회를 온 사람이 있었다. 그를 통해 난 모든 소식을 알수 있었다. 나와 함께 안양에서 대추리로 갔던 박사옥(안양시 기초의원) 후보다. 그는 용케 연행되지 않고 빠져나와 면회를 와 주었다. 안양에서 함께 갔던 다섯 명 중 세 명은 연행되어서 모두 나처럼 유치장 안에 있고 두 명은 연행되지 않고 끝까지 남아서 집회를 했다는 소식이었다.

아내가 경선이와 함께 면회를 와 주었다. 경선이는 선거운동을 돕기 위해 생업도 포기하고 뛰어다닌 일꾼 중의 일꾼이다. 내가 가야 할 곳을 아내와 경선이가 함께 다니며 인사를 했다고 얘기한다. 그리고 '선거운동 걱정은 하지 말고 편한 마음으로 있으라'는 말을 덧붙였다. 난 아내에게 할 말이 없었다. 아내는 대추리에 가려는 나를 극구 만류했다.

6일 아침, 출소자 명단에 내 이름이 끼어 있는 것을 확인했다. 초췌한 모습으로 출소할 때 함께 48시간을 동고동락했던 동지들이 꼭 당선되라며 '화이팅'을 외쳐 주었다. 난 최선을 다해서 당선되겠다고 그들과 약속했다. 경찰서 문을 나서면서 그래도 나의 2세 호연이의 돌잔치에는 참여할 수 있다는 사실에 기뻐했다. 호연이의 돌잔치는 6일 오후 5시였다.

결국 나는 그들과 한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최선을 다했지만 거대한 벽과 같은 기존 보수 지방정치의 두꺼운 벽을 넘지 못했다. 나를 응원해주던 그들에게 미안하다. 그들의 마음은 당선되어서 대추리를 찾아달라는 외침이었을 것이다. 만약 당선되었다면 대추리를 위해서 과연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그것도 아직은 알 수 없다.

대추리에서 연행된 것이 감표 요인이었다는 주변의 평가가 분분하다. 그러나 어차피 가지 않았어도 전국에 몰아친 보수정당의 바람을 이겨내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다시 한번 비슷한 상황이 닥쳐온다 해도 내 선택은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제 난 그들, 5.31 지방선거 모든 당선자들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하고 싶다. '평택 대추리에 가보라' 그리고 '평생을 농사만 지은 주름진 얼굴에 맺혀 있는 절절한 마음을 읽어보라'. 그리고 의정활동에 임하라. 이 제안을 정중한 마음으로 당선자들에게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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