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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채
따가운 햇살이 내려 쪼이는 오후 시간의 한 자락, 서점에서 천천히 꺼내들던 한 권의 시집, 작가가 한 땀 한 땀 써 내려갔을 고뇌의 산물을 접하던 신선한 설렘의 기억. 누구라도 학창시절에 접해봤을 사진 속 한 장의 모습이다.

사람들이 '책을 읽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더 이상 새로울 것이 없는 시대다. 소설과 시를 떠나 초판 발행분만 팔려도 다행이라는 현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소위 '팔리는' 작가는 생겨나기 마련이다.

그녀의 본래 직업은 '제법' 잘 나가는 패션 디자이너였다. 시인의 길로 접어든 건 겨우 10개월 남짓. 언제부터인가 온 몸을 가렵게 자극하는 시어들이 그녀를 놔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어 올해 1, 4월 연달아 낸 두 권의 시집이 모두 대형서점 집계에서 베스트셀러 부문 1~2 위를 휩쓰는 돌풍을 일으켰다.

시인 이채(본명 : 정덕희)는 솔직하다. 98년 이미 <한맥문학>을 통해 수필로 등단한 그녀. 문학의 영역에 많은 언어들이 떠다니고 있지만 가장 좋아하는 것은 '예쁜 언어'라며 자신의 소신을 똑부러지게 밝힌다. 5월의 마지막 날에 그녀와 함께 한 이야기는 이렇다.

중년의 그리움, 중년의 사랑

- 내 놓는 책마다 시 부문 베스트 셀러에 오르는데.
"첫 번째 시집 <그리워서 못 살겠어요 나는>이 2위에 올랐었고, 4월에 나온 <중년이라고 그리움을 모르겠습니까>가 2주 정도 1위에 올랐었죠. 이번 경우 사실 더 예쁘고 멋진 제목도 많았지만(웃음) 사는 것도 어렵고… 중년의 이야기가 필요한 시점이 아닐까 했어요."

- 패션 디자이너였던 이력에서 시인으로의 변신에 많은 관심이 쏠리는 것 같다.
"디자이너는 매력이 많은 직업이죠. 시는 언어의 창조이지만 패션 역시 그러했던 것 같아요. 사실 아직 '시인'이라는 호칭에 익숙하지 않고 한편 자격이 부족하지 않나 싶기도 해요. 오히려 디자인 계통에 이루지 못한 꿈이 남은 듯도 하네요. '이채'라는 이름은 패션 계통에 있을 때부터 써 왔습니다. 평소 이채로운 걸 좋아하던 탓이죠(웃음)."

꽃과 사랑의 향기에 춤추던
삶의 뒤안길로
많은 봄이 스쳐가고, 또 스쳐가고
뜨거운 열정도 일치감치 지나갔지만

아직도 따스한 가슴 식을까
두 손으로 움켜쥐고 걸어오는
중년에 맞이하는 봄
-'중년에 맞이하는 봄' 중.-


- 이번 시집 '중년이라고…' 경우 내용에 공감을 표하는 이들이 많은 것 같다. 중년의 사랑에 대한 생각을 표현한 것인가.
"중년의 사랑…. 현실상 90% 정도는 금지 된 것이 아닐까요. 미혼이라면 모를까 많은 제약이 따르죠. 하지만 인간의 원초적 감정을 사회적 제약으로 막을 수만은 없습니다. 인간의 감정을, 인간이 만든 규약으로 제어한다는 것이 가능할까요. 순수한 감정은 그 자체로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이라 믿습니다. 그만큼 중년의 그리움이 힘겹다는 반증이겠죠."

- 그렇다면 시집은 중년의 사랑에 대한 대리만족이라고 볼 수 있을까.
"무너지고 싶은 마음이야 평소 누구나 간직하고 있는 것 같아요(웃음). 그렇지만 '인생에 사랑만이 최고다'라는 명제에는 동의 못합니다. 사랑보다 더 귀하진 않더라도 '사랑만큼' 소중한 가치들은 많다고 봅니다. 굳이 택하라면 저는 사랑보다는 '진실'쪽입니다. 나로 인해 불행해지는 이를 밟고 만든 사랑이 진정 순수한 것일까 고민해 봅니다. 하긴 그래서 인간은 '왔다 갔다' 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런 마음을 부족한 능력이나마 그려 본 것이겠죠. 제가 한편 보수적인가요(웃음)."

그녀는 자신 역시 대학생 아들을 둔 중년이라며,(나이를 묻자 '공개불가'를 외쳤다) 만일 정 사랑을 현실의 구체적 행동으로 옮기고 싶다면, 걸리지 않는 '몰래한 사랑(?)'을 권하고 싶다며 유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유명해 지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다

▲ 첫 시집 '그리워서 못 살겠어요 나는'
ⓒ 나영준
- 때로 글이 다소 사치스럽다는 비난도 산 것으로 안다.
"솔직히 제가 고생을 못 했거든요. 자랄 때도 외동딸이었고 지금도 남편과 너무 행복하게 살고 있거든요. 그게 죄가 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제가 모든 것을 버리고 공사현장으로 뛰어들 수는 없잖아요. 저는 제 자리에서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겁니다. 오히려 제가 모자란 것을 잘 알기에 더욱 많은 고민을 하죠."

-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위 '삶의 애환'을 중시하는 이들의 반응은 다르지 않은가.
"그렇죠. 제 글에서 행주나 김치 냄새가 나지 않는다는 것 정도는 저도 알죠. 스스로도 예쁘지 않은, 강한 표현은 쓰지 않거든요. 때로는 '강남 시'라는 이야기도 듣고요(웃음). 하지만 애환이 있는 이들일수록 고운 시를 좋아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시가 구원까지는 아니더라도 때로는 고단한 삶을 달래줄 수는 있어야 한다고 믿거든요."

- 그러기 위해 작가적으로 노력하는 것이 있다면.
"사실 '좋은 글을 쓸 재목이 못 되는구나' 하는 자각이 올 때가 있죠. 문학을 하기에 좋은 밭이 아니구나 하는…. 시를 쓴다는 건 내 스스로의 밭을 갈아엎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간접 경험을 위해 노력합니다. 때문에 늘 내면의 나를 혹사 시키는 거죠."

- 팬 카페도 있고 좋아해 주는 이들도 많은 편인 것으로 안다. 글을 써서 이름을 얻는 다는 것에 대한 생각은.
"때로는 솔직했으면 하는 생각이 들어요. 정치인이 권력을, 경제인이 돈을 위해 달리는 것 보고 뭐라 하는 사람은 없잖아요. 그런데 이곳 문학 동네에선 그런 쪽에 대해 너무 초연해 하는 것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어요. 좋은 글을 써 여러 사람의 공감을 얻고 싶은 건 글 쓰는 이에게 소중한 가치라 생각합니다. 이름을 얻는다는 건 그만큼의 책임도 늘어나기에 오히려 좋은 자극제가 될 거라 믿거든요."

- 소설 등 다른 장르의 글을 써 볼 생각은 있는지. 앞으로의 계획을 들려 달라.
"소설은 아무나 못 쓸 것 같고(웃음). 엄마로서 아이를 키우며 느꼈던 솔직담백한 이야기도 하고 싶기는 하네요. 우선은 여름과 가을에 두 권의 시집을 더 낼 계획입니다. 이전의 두 권을 더해 사계절의 이야기를 완성시켜 보고 싶습니다."

데뷔 하자마자 그간 담아 왔던 많은 이야기를 쏟아내는 그녀. 많은 준비 기간이 있었겠다고 묻자 "한편 욕심이라는 생각도 들어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며 빙긋 웃는다. 그리고 남긴 마지막 한 마디를 끝으로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어서 날이 차가워 졌으면 좋겠어요. 가을이면 좋은 생각이 많이 떠오르는데…. 스스로에게 기대를 하게 되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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