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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4월 4일 지금은 물러난 김종빈 검찰총장 취임식에 참석한 검찰간부들. 검찰은 여전히 구속수사라는 관행을 벗어던지지 못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남소연

강정구 교수 사건이 쓸데없이 커지고 있다. 시도 때도 없이 주기적으로 반복돼온 '그냥 그런' 정도의 요란한 '색깔소동'을 넘어선 것 같다. 대한민국 검찰 수장인 검찰총장이 자리를 박차고 나가며 '무언가'에 대해 온몸으로 항의하고, 한나라당은 당연히(?) 이 사태의 책임을 묻자며 법무부 장관의 사퇴를 요구하고 있다. 사회 전체가 편을 갈라 진을 치고 한바탕 대결할 태세다. 어이없는 블랙코미디가 음울한 컬트분위기로 바뀌고 있는 중이다.

나는 사실 지금 이 소동의 와중에서 약간 초조하다. 다행히 대한민국 검찰에서는 내 '사상과 학문'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지만, 나도 몇 년 전 방송통신대 외래강사로 강정구 교수 비슷한 학문적 '상상'을 했던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 상상의 내용은 (점령군이든 해방군이든) 만약 해방기에 미ㆍ소 양대국이 이 땅에 진주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지금 어떤 헌법체제 속에서 살고 있을까라는 것이었다. 이것이 쓸데없는 비학문적 상상이었을까? 절대로 그렇지 않다!

사실 나는 좀 초조하다

헌법학의 시작은 헌법을 최초로 만드는 힘인 '헌법제정권력'에 관한 이야기다. 이 헌법제정권력의 정당성의 근원은 당연히 국가 성립 이전의 인민들에게 있다. 그러므로 이 인민들의 의사가 왜곡 없이 표출되어 정당성을 가진 헌법이 제정되었는지를 따져보는 것은 말하자면 '태초의 헌법학적 빅뱅'을 연구하는 일이다. 그래서 이 왜곡을 관념적으로 제거해보기 위해 '사회과학적 실험실'에서 미ㆍ소 양대국 힘의 부재를 상상해보는 일은 당연할 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절대로 사라지지 않을 불가피한 학문적 기초 작업이다.

'기본적으로!' 강정구 교수가 한 일도 바로 그런 일이었다. 그래서 강 교수의 칼럼도 기본적으로 '…이어야 한다'는 가치판단적인 이야기들이 아니라 '…이다'라는 사실판단에 관한 이야기들이다. 그의 핵심적 주장으로 돼있는 "만약 집안싸움인 이 통일내전에 미국이 개입하지 않았다면 전쟁은 한 달 이내 끝났을 테고, 물론 우리가 실재 겪었던 그런 살상과 파괴라는 비극은 없었을 것[이다]"라는 문장은 분명히 나름의 (가정적) 사실판단일 뿐이다.

그런데 이 나름의 사실판단을 '북한 공산주의로 통일되었[어야 한다]'는 가치판단의 의미로 고쳐 읽어 세상을 쓸데없이 소란스럽게 만드는 것은 난센스를 넘어 코미디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내가 강 교수를 아전인수의 언변으로 변호하고 있는 게 아니다. 학문적으로 아주 중요한 갈림길이므로 진중하게 들어보기 바란다. 강 교수 스스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정당한지 정당하지 않은지는 '가치의 문제'다. 내가 북한이 시도한 통일전쟁이 정당하고 올바르다고 가치판단한 게 아니다. 1950년 10월 1일 남쪽이 38선을 넘어 북진 통일을 위해 밀고 올라갔다. 이것에 대해서도 정당하냐 아니냐는 이야기를 한 적 없다. 다만 사실적 차원에서 남과 북이 서로 '통일'을 목표로 나갔다는 이야기다." (<오마이뉴스>, 2005. 10. 12)

그는 지금 분명한 목소리로 '남한이 잘 했냐, 북한이 잘 했냐'를 따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남한과 미국에 의해 이런 일이 있었다, 그리고 북한과 중국에 의해 저런 일도 있었다'는 과거의 사실에 관한 나름의 판단을 했을 뿐이라는 의미다.

사실판단과 가치판단을 혼동할 때 나오는 코메디

설령 강 교수의 사실판단에 문제가 있다고 해도 난데없이 국가보안법을 들이미는 것은 좀 이상하다. 왜냐하면 예컨대 기상청의 어떤 통보관이 '이런저런 조건으로 봐서 내일은 비가 올 것이다'라고 발표했는데 그 사실판단이 잘못돼 비가 안 왔을 경우 그를 무능하다고 비판하여 퇴출시키는 게 아니라 국가보안법으로 처벌하려는 것은 좀 이상하기 때문이다.

물론 엄밀하게 말한다면 강 교수의 주장에 기상청과 같은 사실판단만이 있었다고 볼 수는 없다. 예컨대 "맥아더는 … 전쟁광", "미국이라는 존재는 … 주범", "미국은 … 원수"라는 표현은 사실판단에 근거한 가치판단이다. 왜냐하면 그런 표현들은 '미국과 맥아더는 나쁘다'는 가치판단과 분노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참고로 E=mc²과 같은 순수한 사실판단만으로는 결코 분노가 생길 수 없다.) 이는 마치 마르크스가 '자연과학적 정확성'을 가지고 자본주의에 관한 사실판단을 한다고 주장하면서도 자본가를 '흡혈귀'로 묘사하며 분노했던 것과 비슷한 현상이다.

자, 이때 우리의 국가보안법은 이 '불편한 가치판단'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지면관계상 국가보안법이 있어야 하느냐 없어야 하느냐의 근원적인 논란을 내포하는 언급은 차치하겠다. 헌법재판소는 아주 오래전인 1990년에 이미 이런 결정을 내렸다.

"국가보안법 제7조(찬양ㆍ고무 등) 제1항 및 제5항은 각 그 소정 행위가 국가의 존립ㆍ안전을 위태롭게 하거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위해를 줄 명백한 위험성이 있는 경우에 적용된다고 할 것이므로 이와 같은 해석하에서는 헌법에 위반되지 아니한다고 할 것이다."(헌재 1990. 4. 2. 89헌가113)

쉽게 말해 국가보안법은 '명백한 위험이 있을 때만 적용하는 법'으로 해석하라는 것이고 그럴 때에만 합헌이라는 말이다. 맥아더의 고향인 미국의 판례는 이를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의 원칙"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이제 '전쟁광', '주범', '원수' 등 강 교수의 가치판단적 발언이 우리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그렇게 명백한 위험을 주는가만 생각해보면 된다.

강정구 교수 발언보다 가수 김수희씨 노래가 더 위험하다

▲ 강정구 동국대 교수.
ⓒ 오마이뉴스 권우성
나는 강정구 교수의 분노 섞인 거친 발언들이 가수 김수희씨가 역시 1990년에 발표한 <서울여자>라는 노래가사보다도 훨씬 덜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고백하건대 나는 김수희씨의 노래를 듣는 순간 그 가치판단적 불온성에 몸서리를 쳤었다. 김수희씨는 세번씩이나 반복되는 다음과 같은 가사로 듣는 이의 감성을 극도로 자극하는 애절하고 선동적인 창법을 통해 이렇게 우리 사회에서 암약했다.

"사랑도 팔고 사는 속이고 속는 세상,♪ 오로지 믿고 의지한 당신마저도, 나를 버리신 서울이 싫어 싫어졌어요.♬"

이곡의 작사자인 김수희씨는 지금 실연당한 사랑을 빙자해 자본주의의 근간인 '팔고 사는' 상품관계를 부정하고 있다. 그래서 사랑까지 팔고 사며, '팔고 사는' 것(사실판단) 속에서 곧 '속이고 속는' 관계(가치판단)를 이끌어내어 대중들을 세뇌시키며 체제부정을 선동하고 있는 것이다. '서울'이 싫어졌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그것은 자본주의 서울을 부정하고 공산주의 평양을 찬양하는 은유적 표현이다. 그녀는 <서울여자>라는 노래를 통해 '평양남자'와의 '붉은 사랑'을 열망했던 것이다.

강정구 교수는 김수희씨와는 달리 '남한이 싫어졌다'고 하지는 않았다. 심지어 그는 "적화통일 바람직하지 않고 가능성 0%도 없다"(<오마이뉴스>, 2005. 10. 11)며 사실판단을 넘어 반공적인 가치판단까지 거침없이 토로한다. 그런데 김수희씨 노래를 듣는 학생들의 취업은 제한하지 않으면서 강정구 교수 강의 듣는 학생들의 취업제한을 운운하거나, 김수희씨를 구속수사하지 않고 강정구 교수만을 기어이 구속수사하겠다며 검찰의 명운를 거는 것은 형평성 차원을 떠나 좀 우습다.

김종빈 총장이 떠나면서 남긴 변

김종빈 전 검찰총장이 떠나면서 남긴 변이 걸작이다. "지휘권 행사 자체가 타당하지 않다고 하여 따르지 않는다면 검찰총장 스스로 법을 어기게 되는 것이며, 나아가 검찰은 통제되지 않는 권력기관이라는 비판을 받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불구속 수사 지휘는 적법하지만 타당하지 않다? 검찰의 수장이었던 그는 지금 아마도 잘못된 법률에 저항했던 '시민불복종 운동'의 기수 소로우의 심정인 모양이다.

검찰의 정치적 중립은 부당한 정치적 간섭을 배제해야 한다는 취지다. 검찰청법(제8조)에 근거해 검찰총장에게 내린 구체적 사건에 대한 불구속 수사 지휘가 부당한 정치적 간섭인가!? 정당하든 부당하든 정권의 모든 지휘ㆍ감독까지를 배제하겠다는 것은 '검찰 독립국가'를 세우겠다는 주장에 다름아니다. 검찰은 잘못된 수사관행을 고치지 못한다면 백번이든 천번이든 지휘ㆍ감독받아야 한다.

사실 나는 이번 천정배 법무장관의 불구속 수사 지휘를 보고 강 교수가 운 좋게 특별 대접을 받았다는 느낌을 갖기는 했다. 이것은 그동안 우리가 교과서적 형사소송절차를 무시했기 때문에 생긴 느낌이다. 강정구 교수든 누구든 '도피 또는 증거인멸'의 염려가 없을 때는 불구속 수사가 원칙임을 이번 소동을 통해 분명히 확인해야 한다. 만약 앞으로 헌법상 무죄추정의 원칙에 근거하는 불구속 수사ㆍ불구속 재판 원칙을 철저히 확립해나가지 못한다면 물러나는 김종빈 전 검찰총장도 할 말이 많이 생길 것이다.

어쨌든 '학계의 김수희, 강정구 교수'를 둘러싼 이 부질없는 소동은 모두들 사정이 웬만하면 이쯤에서 '법대로!' 마무리하고 사회적 에너지를 더 이상 낭비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런 구시대적 글이나 쓰고 있는 나도 정말 한심하다 못해 짜증이 난다. 김수희씨의 <서울여자>나 들어야겠다.

법무부장관에게 이메일을 보내 용퇴를 촉구한 이용주 검사와 다른 많은 분들께도 피곤한 머리를 좀 식힐 수 있도록 이 노래를 한번 들으시라고 권한다. 모두들 강정구 교수에 대해 지금보다 훨씬 관대한 마음이 생기리라고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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