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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 저 푸르른 가을 허공에 매달린 호박 하나는 누구의 긴 기다림이냐
ⓒ 이종찬
어디든 멀찌감치 통한다는
길 옆
주막


수없이 입술이 닿은
이 빠진 낡은 사발에
나도 입술을 댄다.

흡사
정처럼 옮아 오는
막걸리 맛

여기
대대로 슬픈 노정(路程)이 집산(集散)하고
알맞은 자리, 저만치
위엄 있는 송덕비(頌德碑) 위로
맵고도 쓴 시간이 흘러가고….

세월이여!

소금보다 짜다는
인생을 안주하여
주막을 나서면,

노을 비낀 길은
가없이 길고 가늘더라만,

내 입술이 닿은 그런 사발에
누가 또한 닿으랴
이런 무렵에.


▲ 결실의 계절, 가을에 바라보는 모든 풍경은 풍요롭기보다는 왠지 쓸쓸한 느낌이 든다
ⓒ 이종찬
따가운 가을햇살이 뜨락에 선 석류나무에 주렁주렁 매달린 석류를 노을빛으로 한껏 물들이는 시월의 오후. 이상하게 한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냥 훌쩍 목적지도 없이 그냥 그렇게 여행을 떠나고 싶었습니다. 가끔 불어오는 서늘한 바람에 서럽다, 서럽다, 흐느끼며 피어나는 저 보랏빛 쑥부쟁이처럼 들길을 따라 걷고 싶었습니다.

그해 이맘때가 고등학교 3학년 때였던가. 아무튼 그해 가을, 나는 가을 분위기가 물씬 묻어나는 그런 가을노래를 들으려고 라디오 채널을 이리저리 돌렸습니다. 하지만 낡은 라디오는 빈 집에 숨어든 쥐새끼처럼 여전히 지지직거리기만 했습니다. 텅 빈 비좁은 산길에 꿀밤이 툭툭 떨어지는 그런 분위기 나는 가을노래가 들려야만 하는 라디오에서는 내 불안한 인생처럼 여전히 지지직거리는 소리만 들렸습니다.

지난 토요일(8일) 오후.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집을 나섰습니다. 무작정 버스정류소가 있는 곳으로 걸었습니다. 가끔 마주치는 사람 중에는 낯익은 얼굴들도 더러 있었습니다. 나는 그저 가벼운 눈인사만 건네며 일찍 떨어져 뒹구는 낙엽처럼 그렇게 이리저리 흔들리며 걸어만 갔습니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어디로 갈 것인가를 정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 이 쓸쓸함은 아마도 저 풍요로움 뒤에 순식간에 다가올 텅 빈 겨울 때문이 아니겠는가
ⓒ 이종찬
버스정류소에 도착한 나는 아무런 생각도 없이 시외버스 주차장으로 가는 버스를 탔습니다. 애꿎은 하늘만 자꾸 올려다보며 한 시간 여를 기다린 끝에 그 버스에 올라탄 것이었습니다. 버스 안에도 가끔 낯익은 얼굴들이 보였습니다. 나는 또 한번 가벼운 눈인사만 건넨 채 차창 밖으로 눈을 던졌습니다.

스쳐 지나가는 차창 밖에는 온통 은빛 억새들이 떼를 지어 피어나 구절초 등과 어울려 가을잔치를 벌이고 있었습니다. 듬성듬성 나락을 베어놓은 들판 곁에는 금싸라기처럼 누렇게 매달린 벼 알갱이들이 금세라도 툭, 툭, 소리를 내며 껍질을 벗어던지고 제 입 속으로 튀어 들어올 것만 같았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버스가 설 때마다 무심코 내렸고, 또 다른 사람들이 무심코 올라탔습니다.

어디로 갈까? 어느새 시외버스 주차장에 내린 나는 가까운 창녕으로 가는 버스표를 샀습니다. 창녕은 내 어머니의 고향이자 제가 자주 여행을 가는 곳이었습니다. '그래. 가다가 마음에 드는 곳이 있으면 그냥 내리자. 버스가 닿는 시골 어느 마을인들 주막집 하나 없으랴.' 그랬습니다. 아마도 그날 저는 자주 가는 창녕으로 가면서도 어디 낯선 곳에서 낯익은 풍경을 찾으려 애썼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 내가 어릴 적에는 가지에 주렁주렁 매달린 저 꿀밤(도토리)을 한 줌 따다가 동무들과 구슬치기를 했다
ⓒ 이종찬
그렇게 시외버스를 타고 가다가 무턱대고 내린 곳이 창녕 남지읍이었습니다. 그곳에도 어김없이 낙동강 둑길 옆에 주막집이 하나 있었습니다. '왕대포' 란 큼지막한 글씨가 때 낀 유리창에 하얗게 새겨진, 탁자조차 제대로 없는 그런 주막집이었습니다. 나는 그 주막집 주변에 '위엄 있는 송덕비'가 하나 떡 버티고 있는 그 마을의 풍경을 잠시 바라보다가 불쑥 주막으로 들어갔습니다.

그 주막 안에는 여느 주막집처럼 얼굴에 주름이 쪼글쪼글한 시골 노인들 몇몇이 이 빠진 사발에 반쯤 남은 막걸리잔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대낮인데도 어두침침한 그 주막 한 귀퉁이에는 제법 젊게 보이는 아주머니 한 분이 의자 위에 보퉁이 하나 올려놓고 주막 밖 짙푸른 하늘에 삿대질까지 마구 해가며 막걸리를 꿀꺽꿀꺽 마시고 있었습니다.

"아지메! 여기도 막걸리 한 잔 주이소"
"예에~ 근데 오데서 오셨능교? 낯 선 분이시네"
"아, 예. 버스를 타고 가다가 이 마을 경치가 하도 좋아가꼬 잠깐 내렸지예"
"근데 어디서 많이 뵌 분 같네예?"
"크~ 이 집 막걸리 맛 한번 기똥차네"


▲ 여행을 가다가 밭둑에 노인처럼 널브러진 호박을 바라보면 갑자기 인생무상이 느껴진다
ⓒ 이종찬
그날, 나는 "소금보다 짜다는/ 인생을 안주하"고 있는 시골 노인들에게 막걸리 한 사발씩을 돌렸습니다. 그리고 불그스름한 얼굴로 주막을 나서니, 주막 밖에는 내 얼굴 같은 바알간 노을이 조금 전 막걸리 안주로 떠먹은 그 김칫국물빛처럼 번지고 있었습니다. 그때 문득, 주막집을 다시 바라보니 아까 내가 앉았던 그 자리에 낯선 사내 하나가 앉아 아까 내가 마셨던 그 이 빠진 막걸리 잔을 들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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